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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의 끝, 해가 가장 먼저 뜨는 변방의 나라에는 하늘과 같이 푸른 빛을 띠는 청룡이 그 땅을 수호한다고 하였다. 농부들은 부지런하여서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청룡의 축복을 받은 땅에 농사를 지어 생을 이어나갔고, 어린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학문을 배우거나 밭에 나가 부모를 도왔다.  

천 년 동안 이어진 청룡의 은혜는 백성들을 먹여 살렸고, 열 번의 세기가 지나도록 전쟁이 나지 않게 보호해주었다. 

그러나, 전대 국왕이 세상을 떠난 뒤, 온 나라의 기대를 받으며 즉위한 국왕은 청룡의 실존을 믿지 않았다.  

수년간 자신의 나라가 적으로부터 안전했던 것은 오로지 본인과 선대왕의 노력이었다고 굳게 믿은 국왕은, 한낱 미신에 세금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하여 매년 올리던 제사조차 진행하지 않았으며, 전국 곳곳에 세워져 있던 사당들마저 폐쇄하였다.  

청룡의 존재는 오랫동안 온 국민에게 신앙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새로운 왕의 명령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왕은 그 누구라도 청룡에게 재물을 바치는 자가 있다면 엄벌에 처할 것이라 명령을 내렸으며, 청룡에 대한 모든 제사, 기도와 순례를 금지했다.  

신하들과 백성들은 청룡이 노할 것이라며 반대하였으나, 그 누구도 왕의 결정을 꺾을 수는 없었고, 결국 궁궐에 지어진 신당마저 이듬해에 폐쇄되었다. 

 

 

수도에서 만 리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에는 가난한 왕족이 있었다. 성씨도 그 흔한 김 씨를 가져, 김 훈장이라 불리던 그는 선대 왕의 먼 사촌이었으며, 갓 열아홉이 된 아들과 살고 있었다.  

그는 한때 서른이라는 나이에 입궐하여 오랫동안 왕의 최측근에서 정치했던 벼슬아치였다.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 법할 정도로 유능했던 김 씨는 현대의 국왕이 들어선 뒤, 관직에서 물러나 이 작은 마을에서 어린아이들의 훈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가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리에서 왜 스스로 내려온 것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김 씨는 현명한 선비였고, 그를 수십 년간 봐온 마을 사람들은 그가 헛된 짓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조정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미리 살피고 현명한 선택을 했거나, 또는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이곳까지 내려왔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했지만, 진위는 파악할 수 없었다.  

 

김 선비가 이 마을에 처음 왔을 때 그는 갓 여섯 살을 먹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왔다. 넓을 홍에 가운데 중을 써서 제 아들에게 홍중이라는 이름을 지은 김 훈장은 홍중을 금은보화 다루듯 애지중지 키웠다.  

어머니 없이 자라는 것이 해가 되지 않도록, 또 홍중이 자라면서 잘못된 관념을 가지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를 시켰으며, 전국의 바다와 산을 돌아다니며 학문뿐만 아니라 세상 물정 또한 가르쳐 주었다.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덕분인지, 홍중은 여느 아이들처럼 말썽을 피우지도 않고, 지식과 도덕 어느 하나 모자라지 않는 청년으로 자랐으며, 아직 열 살도 먹지 않은 소년이었지만 미래에 자신의 아버지처럼 훌륭한 학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홍중이 성화를 만난 것은 열아홉의 무렵이었다.  

찌뿌둥한 장마철이었음에도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와 선선한 바람,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경쾌한 새소리가 어우러져 찬란한 하늘을 그렸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인쇄소에 다녀오던 홍중은 종이를 구하고 남은 잔돈을 세며 집에 오는 길에 시장에 들러 곧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을 친구 산이를 위해 선물을 사 가려던 참이었다.  

죽마고우로 지낸 지 벌써 아홉 해가 지났지만, 홍중은 산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경상도의 남쪽에서 자라 바다와 산을 누비며 다녔다는 이야기는 어릴 적부터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었는데도 산이의 취향이나 취미에는 무지했다. 내가 그렇게 산이에게 관심이 없었나. 

시장을 돌아다닌 지 몇 시간이 지나도록 여전히 홍중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종이와 벼루를 주자니, 산은 공부엔 딱히 관심이 없었고, 비단옷을 사자니 얼마 못 가 헤질 것이 뻔하였다. 그렇게 고민하며 계속 시장을 돌던 홍중은 멀리서 풍겨오는 단 냄새에 홀린 듯 빠른 걸음으로 과자점에 도착했다.  

바삭바삭한 유과, 달콤한 조청 과자 등등 단 것이라면 눈이 회까닥 도는 홍중은 진열대 너머로 보이는 과자마다 몽땅 쓸어 담으려다 아차차 하고는 딱 먹을 만큼만 산 뒤 주인아주머니께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풍기는 달콤한 내음이 여름 공기와 어우러지자 홍중은 행복한 생각에 입꼬리를 씩 올리며 힘차게 시장을 나섰다. 집에 가서 복동이, 금순이와도 나눠 먹고, 주방 아주머니께도 드리고, 아 아버지께도 드려야지. 지금쯤이면 수업이 끝났을 거야. 

 

"아!" 

 

한 손에는 끈으로 돌돌 묶인 종이, 다른 손엔 달콤한 과자를 들고 걸어가던 소년을 넘어트린 건 갑자기 나타난 남자였다. 머릿속에서 펼쳐지던 생각들의 향연에 정신을 파느라 모퉁이에서 걸어 나오던 남자를 보지 못했던 홍중은 엉덩방아를 찧어 아픈 것도 잠시, 혹여 제가 부딪힌 사람이 지위 높은 어르신은 아닐까 허겁지겁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 

"어, 홍중이 맞지?" 

 

예?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그의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청빛 비단옷을 입고 갓을 쓴 남자는 홍중보다 조금 더 키가 큰 듯하였는데, 남자의 나이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르신은 아닌가.  

당황하는 것도 잠시, 널브러진 종이들을 주워 바지를 툭툭 털고서 다급히 일어나니, 생각보다 어린 목소리와 얼굴을 가진 남자는 예의 그 표정 그대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날카롭게 생겨 무서운 조류를 닮은 듯했는데, 주름이 겹으로 잡힌 눈꺼풀과 오동통한 입술을 보면 반대로 어딘가 순해 보이기도 했다. 

 

"만나서 반갑다,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저, 저를 아십니까?"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말을 꺼내는 남자에 홍중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늘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친절을 베풀고, 기억에 담아두라고 했던 홍중의 아버지 덕분에 웬만한 이웃들은 두루두루 알고 있는 홍중이었지만, 제 앞에서 인사를 하는 이 남자는 도저히 기억해낼 길이 없었다. 

한참을 기억을 더듬으며 당혹해하는 홍중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계속 홍중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나 성화야. 기억 안 나?" 

“미안합니다, 전혀 기억이…” 

 

홍중의 대답에 성화는 유감스럽다는 듯 웃으며 곧게 뻗은 손을 건넸다.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이니까. 그의 환한 웃음에 홍중은 마음을 내려놓고 악수를 할 수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시린 손은 딱히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홍중아, "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는 홍중을 빤히 바라보던 성화는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비장한 목소리로 홍중을 불렀다. 책에 완전히 몰입해버린 건지, 종이에 코를 파묻고 새까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홍중은 성화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김홍중.” 

 

성화가 다시 한번 홍중을 부르자 반짝이는 눈동자로 열심히 책 속 글씨를 들여다보던 홍중은 그의 부름에 살짝 눈을 올려 무슨 일이냐는 듯 눈빛을 보내고는 읽고 있던 책장 위에 비단으로 만든 책갈피를 올린 뒤 표지를 덮고 다른 문구류들과 함께 한쪽으로 치워냈다.  

 

“응, 뭔데?” 

 

활짝 웃으며 성화가 말을 꺼내길 기다리던 홍중은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웃어 보였다.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찬란한 햇빛에 홍중의 얼굴이 비치자 그 얼굴에 순간 넋을 잃은 성화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평소에도 빛나던 홍중의 눈동자는 햇살 때문인지 오늘따라 영롱하게 빛났는데, 그의 눈을 바라볼 때마다 성화는 항상 속으로 감탄하고는 했다.  

 

"요즈음 많이 바빠? 얼마 전에 너희 집으로 찾아갔는데 안에 없더라고...” 

 

장터에서 처음 마주치고 난 뒤, 성화와 홍중이 친해지는 것은 조금 시간이 걸렸다. 특유의 미소와 손짓만 보면 지극히 외향적으로 보이는 홍중도 의외로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었던 건지, 홍중과 친해지는 것에는 큰 노력이 필요했다. 물론 성화도 짬밥이 있는지라 문제는 없었지만, 그렇게 열심히 친해졌는데 요즈음 들어 부쩍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길어져 버린 홍중이 걱정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홍중을 만날 생각에 그의 집에 찾아가면, 마당에서 청소하던 복동이가 마중 나와 십중팔구 도련님이 방에 계신다고 하였는데, 최근에는 그가 밖에 나가 있다는 대답만 돌아와 잔뜩 실망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대다수였다. 

물론 밖에 혼자 있어도 기죽지 않고 씩씩하게 생활하는 홍중이었고, 언제까지 제가 그의 옆에 붙어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항상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던 제 벗이 밖에 나가 몇 시간 째 돌아오지 않으니 걱정이 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홍중은 잠시 성화의 질문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생각을 하더니, 이내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를 했다. 

 

“미안해. 그러고 보니까 요즘 많이 바빴던 것 같아. 그래도 오늘은 종일 붙어있을 수 있잖아.” 

 

홍중은 큰일 아니라는 듯 성화의 어깨를 살짝 치며 웃어 보였다. 그렇긴 했다. 사실 홍중이 열흘 동안 외박을 하든 갑자기 중이 되겠다며 절을 찾아가든 제가 참견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옆에 없으니 허전하고,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데. 

섭섭한 성화의 마음을 읽은 건지, 홍중은 한쪽에 둔 책을 다시 꺼내려다 시무룩해진 성화 옆으로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산이라고,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는데 요새 무슨 일을 많이 하나 봐. 일손은 많을수록 좋잖아.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놀러 갔었어.” 

“이름이 산이야?” 

“응. 성은 최씨, 이름은 산. 외자야. 아, 경상도에서 왔다고 했는데, 너랑 고향 친구다 그치.” 

“어, 그러네.” 

“나중에 내가 산이 소개해줄게. 엄청 착하고 좋은 애니까 너도 좋아할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손을 모은 홍중은 성화에게 새 친구를 소개해줄 생각에 설레어 보였다. 그의 말에 싱긋 웃어보인 성화는 곧 다시 책 속에 빠져버린 홍중을 바라보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정자 너머로 보이는 호수는 잔잔했고 어딘가 공허하지만 산뜻한 가을바람도 은은하게 풀 내음을 품고 있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 하늘엔 새들이 날아다녔고, 언덕 위에 자란 강아지풀은 바람에 맞추어 춤을 추는 듯했다. 전엔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 날씨가 참 애매하다고 생각했던 성화도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모양이다. 

 

 

성화는 인간이 부러웠다. 

이무기로 태어난 성화는 천년을 꼬박 수련하여 청룡이 되었다. 열 세기, 한 나라가 멸망하고 다시 세워질 만큼의 시간 동안 성화는 차가운 물 속에서 수련하며 고난을 버텨야 했다.  

사실 말이 수련이지, 누군가가 성화에게 천 년 동안 다시 수련하라고 시킨다면 그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거절할 것이다. 한번 시작한 일은 꼭 끝을 보고야 말았던 성화의 성격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지, 용이 되기 위한 수련은 평범한 이무기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천둥과 번개가 치고 폭풍우가 오던 날, 성화가 수련을 시작한 뒤 맞는 천 번째 태양이 수평선 위로 올라오자, 이무기는 푸른 바다의 빛깔을 담은 비늘과 굳센 뿔을 자라내며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승천하였다. 천년의 노력이 열매를 맺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승천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오랜 기다림 끝에 동쪽의 끝에 자리한 나라를 수호하게 된 성화는 또다시 시련의 길을 걷는 듯했다. 희망을 품고 찾아간 그 좁은 나라에서 극적인 일들이 얼마나 일어나던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일 백성들의 절규와 울음이 들려오는 통에 성화는 편히 잠을 잘 수조차 없었다.  

자식들은 전쟁터로 끌려가고, 탐관오리들은 힘없는 백성들에게서 식량을 빼앗아갔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허수아비였던 왕은 민심을 잃은 지 오래였고, 신하들조차 편을 나누어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이 본인들의 이익만 챙기려 했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내가 남의 인생사나 밤새도록 들으려고 수련한 게 아닌데 이 망할 나라는 왜 이 모양일까. 아직도 귓가에 웅웅거리며 들리는 기도문들 때문에 책상에 앉아 머리를 감싸고 엎어져 있던 성화는 충동적으로 옷을 껴입은 뒤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이 망할 나라가 왜 이 모양인지 내가 직접 해결해야겠어. 

 

지긋지긋한 삶의 굴레와 백성들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찾아간 인간들의 세상에서 성화는, 우연하게도 홍중을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몇백 년 전의 홍중을 만났다.  

아마 전생의 홍중이었겠지. 유난히도 빛나는 눈동자와 끝이 살짝 올라간 코끝, 그때의 김홍중은 지금과 별다른 것이 없었다. 홍중은 부잣집의 자손도, 관아에서 일하는 벼슬아치도 아니었다. 그저 열심히 공부하며 살아가던 청년은 백성들이 가난과 탐관오리의 갑질에 시달려 삶의 의지를 잃어갈 때도 그 작은 체구로 마을의 집마다 돌아다니며 보리죽과 나물을 나누어주며 그들을 도와주고 일으켜 세웠다.  

처음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 일부가 되리라 생각했다. 구태여 잡아두려 하지 않았고, 떠난다 해도 붙잡지 않는 것이 성화 나름의 좌우명이었건만, 진정으로 자신의 이웃들을 도와주던 홍중의 삶을 지켜보기 시작한 후, 성화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원을 빌었다. 

 

'인간이 되게 해주세요.' 

 

성화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아니, 사람으로 변장한 용인데도 같은 사람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친절하게 대해주고, 음식을 나누어주고, 정을 내어주고, 유대감을 나누는 사이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성화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몇백 년간 인간들과 어우러져 살면서 지켜본 결과 사랑은 때로 인간들을 끝없는 파멸로, 또는 백년해로의 행복으로 몰고 갔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지만, 사랑으로 인해 극과 극의 결말을 쓰게 되는 인간들을 보며 성화는 사랑이 인간을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미친 짓이었다.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는 청룡이 고작 백 년 조차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이 되겠다고 소원을 빈다는 것은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며 성화를 돌려보내려던 옥황상제도 그의 간절한 청에 결국 약조를 맺었다. 

천 년 동안 인간 세계에 적응해 살아가면, 성화는 인간의 몸을 갖게 된다. 

다만, 그 기간 안에 인간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는 순간, 그 즉시 청룡도 이무기도 아닌 것이 되어 사라지며 죽음 이후에 환생 따위는 없을 것이라 경고했다. 

다시 이무기가 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진다니. 어처구니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옥황상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성화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한 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해내야 했다. 

곧 죽어 지옥에 떨어지게 되더라도, 인간이 되어 사랑을 느껴보고 싶었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어느덧 추운 겨울 눈을 불러왔다. 빨갛고 노랗던 나뭇잎들이 하나둘 떨어지자 하얀 눈이 그 위를 덮었다. 소복이 쌓인 눈길을 걷던 홍중과 성화는 둘이 종종 만나고는 했던 언덕 위의 정자로 향하고 있었다. 

입동 즈음이었던 홍중의 생일 후로 둘은 서로 만나는 일이 드물었다. 딱히 큰 다툼은 없었지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찾지 않았던 한 달 동안 홍중은 곧 있을 과거 시험을 위해 집에서 공부했고, 성화는 어느새 천년의 마지막 몇 달 만을 남겨두어 점점 인간처럼 변해가며 마찬가지로 수련에 열중이었다. 하지만 늘 옆에 붙어있던 친구가 보이지 않아 어딘가 허전하게 느껴지는 공기도 어색했다. 

어젯밤에 잠시 내렸던 눈 때문인지, 한참을 걸어 도착한 정자의 기와에는 투명한 고드름이 달려있었고, 나무로 만들어진 난간에도 조금 녹아내린 하얀 눈이 쌓여있었다.  

어제가 첫눈이었지 아마? 홍중이 난간을 붙잡고 지붕에 달린 고드름을 따며 성화에게 넌지시 물었다. 응, 첫눈이었을걸. 눈이 녹아 축축하게 젖은 바닥에 짚단을 깔던 성화는 잠시 생각하더니 홍중의 물음에 대답했다. 

얼른 앉아. 이제 바지 안 젖을 거야. 응. 한 손에 고드름을 들고 까득까득 깨물어 먹는 홍중과 바닥에 짚단을 깔고 남은 지푸라기로 새끼줄을 꼬던 성화는 그렇게 한참을 정자에 앉아있었다. 

 

“...나 내일 도성으로 떠나게 되었어.” 

“...도성에?” 

“조정에서 사람을 보냈더라고. 다음... 왕위를 이을 계승자가 없어서...” 

 

용기를 내어 침묵을 깬 홍중은 성화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애꿎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지만, 정자에는 다시 적막만 돌았다. 며칠 만에 만나서 꺼내는 첫마디가 잘 지냈어도 아니고 갑자기 떠난다는 이별 통보라니, 홍중도 저 자신이 미웠다.  

오랜 정적 끝에 겨우 입을 연 성화가 홍중의 어깨를 두드리며 애써 괜찮은 듯 토닥였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고,” 

“못... 돌아올 수도 있어.” 

“...” 

“...사실 너무 두려워, 왕이라는 자리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나는 그냥 아버지처럼 아이들 가르치는 훈장님이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이 벌어지니까… 정말 나를 왕위 계승자로 삼으려는 건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 그냥…” 

“...홍중아,” 

“무엇보다 너 두고 가기도 싫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는 홍중에 성화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축 처진 몸이 보기 안쓰러웠다. 이렇게 풀 죽어있는 애가 아니었는데. 

 

“그래서, 성화야…” 

 

할 말이 있는 듯 뜸을 들이는 홍중의 모습에 성화는 되려 긴장했다. 순간 어둡던 하늘에서 하얀 눈이 별빛처럼 쏟아져 내리고, 시간이 마치 그림의 한 장면처럼 느려지는 것 같았다. 산들바람이 불며 흩날리는 눈꽃 속에 추위로 인해 빨개진 홍중의 얼굴과 반짝이는 눈이 보였다. 

홍중의 눈은 줄곧 성화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별, 달, 태양, 이 세상의 모든 빛을 비추던 홍중의 눈동자는 그의 속마음까지는 비추지 못했다. 지금도, 성화는 홍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복잡한 성화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홍중은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다가 두 팔을 벌려 성화를 껴안아 주었다. 추운 날씨에 잔뜩 차가워진 겉옷도 이내 전해진 따듯한 체온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갑작스러운 홍중의 행동에 놀란 성화는 곧 다른 팔로 홍중을 감싸 안았다. 작은 체구가 간헐적으로 떨리며 하얀 입김을 뿜어냈다. 

 

“내가 많이 사랑해 성화야.” 

 

다시 만날 때까지 기다려줘. 부탁할게. 

 

 

근래에 도성에서는 역모를 꾀하다 죽은 왕족의 이야기가 화젯거리였다. 왕위 계승 후보에도 올라가지 않은 왕의 먼 친척이었던 남자는 작은 마을에서 청룡을 숭배하며 마을 백성들에게서 음식과 금품을 갈취해갔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청룡에게 제 영혼을 담보로 왕을 몰아내게 해달라는 간청까지 빌어 저를 믿고 따르는 백성들과 임금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이야기였다. 

한낱 가십거리라기엔 너무나도 유명해져 버린 이야기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였다. 잃어버린 민심을 되찾기 위한 왕의 정치질이다, 청룡을 다시 신으로 모시려는 단체의 소행이다, 정말 역모를 일으키려는 집단의 경고이다, 등등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다 개소리다.  

김홍중은 왕이 되고 싶어 한 적 없었다. 백성들의 음식과 금품을 갈취하지도 않았고, 청룡에게 영혼을 팔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작은 마을에서 제 아버지처럼 어린아이들이나 가르치며 사는 것이 김홍중의 소원이었다. 

이미 이 나라는 청룡에게서 버려진 지 오래였다. 허수아비 왕을 조종하던 신하들은 정신을 차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고, 탐관오리들은 여전히 백성들을 부려먹으며 빈익빈 부익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청룡의 신화가 자극제라도 되었는지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왕국은 점점 무너져내렸고 태초의 찬란하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신을 저버린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허영심을 채우기에 바빠, 본래의 모습을 금세 잊어버렸다.  

김홍중은 그런 조정의 권력 싸움에 휘말려 결국 죽음까지 내몰리게 된 경우였다. 단지 그가 젊은 왕족이었고, 청룡과 관련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룡, 그 망할 청룡 때문에 김홍중은 죽었다. 

 

동쪽의 끝, 해가 가장 먼저 뜨는 변방의 지역에는 하늘과 같이 푸른 빛을 띠는 청룡이 그 땅을 수호했었다고 전해진다.  

천 년 동안 이어진 청룡의 은혜는 백성들을 먹여 살렸고, 열 번의 세기가 지나도록 그 땅에 전쟁이 나지 않게 보호해주었다. 

그러나 청룡의 은혜는 곧 사라지게 되었고, 찬란하게 빛나며 자라나던 왕국은- 

 

 

“-한순간에 전쟁과 자연재해로 멸망하고 말았다…” 

“무슨, 신화가 이렇게 심오하냐.” 

“우리 조상님들도 판타지 소설에 재능이 있으셨네. 대단하다.” 

“대단하다니, 이런 건 나도 쓸 수 있겠다. 클리셰 아니야 완전?” 

 

쉬는 시간, 평소 책벌레로 유명한 2학년 4반의 강여상의 책상 주변에 모인 윤호, 산, 민기, 우영, 그리고 1학년인 종호는 오늘도 여상이 읽어주는 책에 대한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책 제목은 ‘청룡’, 최근 사방 신에 관심을 가지게 된 여상이 도서관에서 한 시간가량 헤매다가 찾은 책이었다.  

 

“난 등장인물 중에 산이라는 인물이 있다는 게 제일 신기해... “ 

“야, 나도 살면서 너 말고 다른 산을 보게 될 줄은 처음 알았다.” 

“나도 아는 형 중에 이름 성화인 형 있어. 진짜 신기하지 않냐.” 

“잠시만, 좀 소름이다, 나 환생 같은 거 안 믿었는데 지금 막 믿으려고 그래.” 

 

소설에 과몰입 하지 마라 최산. 우영이 입에 물고 있던 연필로 산의 머리를 툭 치며 말했다. 아, 더러워! 산은 우영의 연필을 멀리 쳐내며 소리쳤다. 야야, 민기 깨겠다. 아 형 고막 터지겠어요. 시끄러워, 볼륨 좀 줄여라- 

 

 

“아, 성화형 공부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에요?” 

“열심히 해야 대학 가는 거야 인마.” 

“형 기다리느라 지루해 뒤지는 줄 알았다고.” 

 

푸른색 명찰을 단 학생 주위로 노란색 명찰과 초록색 명찰을 단 여섯 명의 학생들이 어두워진 학교 교문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12월 말, 하얀 눈이 내리고 입김이 서리는 겨울의 오후였다. 

 

“형 우리 오랜만에 호수로 놀러 갈래요? 오늘 날씨엔 호수도 얼었을 것 같아요.” 

“와 진짜 오랜만인데. 거기 안 가본지 엄청 오래된 것 같아.” 

“형만 안 가봤지 저희끼리는 지난주에도 다녀왔어요.” 

 

와 진짜? 너무하네. 종호가 특유의 말투로 성화에게 일침을 날리자, 성화가 과장되게 삐진 척을 하며 호수와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아 형 그만 삐지고! 저만치 걸어가는 성화를 붙잡으려  뛰어오는 동생들이었다. 

노을이 지는 언덕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벗어던지고 호수로 들어간 동생들을 보며 성화는 괜히 생각이 많아져 언덕 위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건물도 보이고 벤치도 보인다. 어릴 땐 이게 마냥 신기해 보였는데...  

 

“형.” 

 

응? 어느새 호수에서 나와 제 옆에 앉아있는 산이 어울리지 않게 진중한 표정으로 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늘 여상이가 가져온 책을 다 같이 읽었는데, 주인공 이름이 성화였어요.” 

“헐 진짜? 말도 안 돼.”
“산도 있더라고요. 진짜 말도 안되죠.” 

“그러게. 신기하다…” 

 

환생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 싶어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하는 산에 성화가 웃으며 괜히 어깨를 툭 쳤다. 그런 거 다 미신이야. 진짜면 어떡해요… 

 

“...근데, 주인공이 성화랑 산, 이렇게 둘이었어?” 

 

잠시 흐르던 정적을 깬 것은 성화였다. 성화의 질문에 놀란 듯한 산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아뇨, 산은 주인공이 아니었어요. 이름이 뭐였더라… 무슨 김-” 

“...저, 저기요.” 

 

저들을 부르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건 제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성화보다 다섯 걸음 뒤에 서 있던 소년은 단정하게 정돈된 앞머리에 깔끔한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넥타이도 제대로 매지 않은 채 흙탕물에 찌든 성화와 산의 교복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혹시... 박성화씨 맞으세요..?” 

“네? 아, 네 박성화 맞아요.”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제 이름을 하는 소년에 성화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답하자,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소년의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한 빨강으로 브릿지 염색을 한 머리, 한 손에 들고 있는 책, 그리고 왼쪽 가슴에 달린 푸른색 명찰은, 성화네 학교의 명찰이었다. 학교에서 본 적이 있었던가? 명찰에 적힌 글씨를 읽어보니 김홍중이라 쓰여있다. 김홍중? 

 

“나 홍중이야. 기억 안 나?” 

 

반가운 듯 손을 내미는 홍중에 성화는 어떻게든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노력했지만 도무지 기억나질 않았다. 김홍중? 김홍중이 누구지? 

 

“정말 미안해 전혀 기억이 안 나서..” 

“괜찮아.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이니까.”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건네는 홍중의 눈동자가 빛났다. 때마침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의 어스름에 언덕 위에 위치한 정자가 보인다. 정자, 호수, 겨울… 

 

아 

 

“기다려 줘서 고마워 성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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