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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gger warning: 약물, 성관계를 암시하는 묘사
 

 

 

변호사 김홍중. 특별하다면 특별한 이고 평범하다면 평범한 이다. 엘리트 집안에서 자라 정도만 밟으며 법대 졸업 후 바로 사시에 합격해 승률이 거의 100퍼센트에 다다른다는 전설의 사법연수원 10기생이었다. 방송에도 몇 번 얼굴을 비춰 법률 관련 직종을 꿈꾸는 아이들의 롤모델 노릇도 겸하고 있었다. 누구나 알법한 로펌에 이십여 년을 바른 정장 차림으로 당당히 근무하는 사람. 그것이 김홍중이었다. 그는 엘리트의 전형이자 성공한 사십 대의 스타 변호사였다.


하지만 일이 늘 순탄하면 재미없는 법 아닌가. 우여곡절 없이 상승고도만 타던 그의 인생에 종이비행기가 날아와 꽂힌 건 바야흐로 한 달 전쯤 일이다. 서류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그의 앞에 누군가 음료수를 놓아두었고 목이 마르던 그는 생각 없이 그것을 마신 것이다. 한 입 주욱 들이켰다.
그리고 정확히 세 달 뒤 그는 직장을 퇴사했다.

 

 


***

 

 


유독 햇살이 쨍쨍한 날이었다. 출근길에 아메리카노를 사기 위해 은색 벤츠를 잠시 주차해두고 카페에 갔다가 카페 알바한테 번호를 따였다. 스무 살 넘은 지 얼마 안 된 이가 아저씨 번호를 따가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회사에 도착하니 경비에게 문전박대를 당했다. 웬 대학생이 회사 주변에 어슬렁거리고 혼났다. 겨우 출입증을 보여주고 들어가니 이번엔 동료들이 말썽이었 다. 김홍중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니.. 세상에.


스무 살 후반의 김홍중, 동안인 편이라 그보다 어리게 보이는. 분명 제 얼굴이 거울에 동동 떠다니는 것이다. 놀라서 뺨도 때려보았으나 아팠다. 무지하게. 꿈이 아니었다! 김홍중은 조퇴를 했다. 조퇴라기보다는 홍중인 것을 아무도 믿지 않아 쫓겨난 것이 알맞다. 회사에 아프다고 일방적통보를 한 뒤-로펌의 얼굴 격이라 잘리지는 않았다. 하루에 한 살씩 젊어지다가 어느 날 멈췄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분명 스무 살 적 청춘의 얼굴이다.


원인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젊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점점 어릴 적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좌절하고 꺾일만했지만 홍중은 원체 굳센 이라 스물한 달 뒤 새 인생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대신 결심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사회적 시선 때문에 못한 거나 실컷 할 거다. 누구보다 성공한 엘리트의 전형인 그는 사실, 막사는 삶을 동경했다. 학창 시절 도서부 대신 댄스부가 하고 싶었고 학회를 다니는 대신 클럽에서 몸을 한 번쯤은 부대껴보고 싶었다. 전화로 퇴사 통보를 하고 법적인 체계를 살짝 피해 새 인생을 누릴 방법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기념으로 스무살이 되는 날에는... 가장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했다.


머리를 새빨갛게 염색하고 게이바에 가서 환락의 밤을 보낼 것이다.

 

 

 


청춘 회귀
단비

 

 

 

 

 


드디어 심사숙고하던 그날이었다! 매사에 꼼꼼한 홍중답게 밤새워 노트북과 폰을 오가며 유명한게이바와 클럽이란 클럽은 다 찾아놨다. 아직 새싹 호모인 그가 전용 커뮤니티를 찾아 열심히 눈팅해본 결과 이태원의 서머라는 클럽이 가장 유명했다. 속된 말이 물이 좋다고 한다. 위험성은 약간 높지만 그만큼 스릴 넘치고 제일 유병한 곳이랬다. 그리고 주위에 모텔이니 숙박시설이니 뭐가 많았다.


홍중은 다시 한번 네이버 지도에 위치를 꼼꼼히 검색해보고 지하철 경로도 확인했다. 은색의 깔쌈한 롤스로이스는 스무 살한테 어울리지 않았다. 이 날을 위해 특별히 주문한 살짝 파인 가디건과 찢어진 검은색 진을 입었다. 마지막으로 워커를 신고 그는 길을 나섰다. 심장이 기대로 번뜩였다. 지하철 카드를 찍는데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는 다행히 도착할 수 있었다.


썸머. 레트로 풍의 알파벳이 화려하게 적힌 전광판이 가랑 마주했다. 빨갛게 칠해진 큰 대문 앞에서 홍중은 한참을 망설였다. 당연하게도 계속 육중한 대문을 드나드는 이는 전부 아래 거 달린 남자였다. 제대로 온 것이다. 심호흡 끝에 그는 발걸음을 나선다.

 

 


***

 

 


들어가자마자 보인 건 현란한 조명이었다. 가운데 스테이지를 중심으로 빨갛고 파랗고.. 형형 색깔의 빛이 비치고 있었고 오로지 남자. 남자. 남자였다. 모두들 그게 당연한 듯 몸을 부대끼고 즐기고 있었다. 누가 들어온들 신경 안 쓰고 저 할 것을 하며 나름대로 즐기고 있었다. 조명 밝은 곳에서는 허리를 들썩이는 이들이 있었고 민망해 시선을 돌리면 어두운 쪽에서는 저마다의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눈 둘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입구에서 멍하니 서있던 홍중은 어찌어찌하다 군중에 밀려 그 사이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찌어찌 못하고 외양은 스무 살 정신은 사십 대는 어색하게 웃으며 방황 중이었다. 결국 몸 둘 곳을 찾지 못하고 구석진 벽에 붙어서 우울하게 폰이나훑어보던 그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컴 히얼 키티.
미? 예스. 유.

 


덩치 큰 남자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금붙이가 온몸에서 반짝였다. 스냅백을 거꾸로 눌러쓰고 엉덩이까지 내려간 바지를 입었다. 민소매로 드러난 팔뚝에는 문신이 가득했다. 아마 사십 대 홍중이 봤다면 옆으로 슬쩍 피해 갔을 것이다. 그러나 꿀릴 것 없다. 지금은 그 역시 피 끓는 청춘이다. 그는 룸으로 가면 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가는 도중 말을 건다.


몇 살이야? 스.. 스무 살이요. 처음 왔어? 남자는 홍중의 어깨를 슬쩍 어루만진다. 한국말을 쓸 줄알면서 왜 영어를 했는지 알면서도 모를 모양이었다.네.. 귀엽네. 나는 스물셋이야. 형이라고 불러.형은 개뿔. 홍중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평생의 반을 책상 앞에서 살아온 그에게는 지금 상황 자체가 버거웠다.


드디어 룸에 다다랐다. 분명 게이 커뮤니티에서 룸으로 가면 그건 성공이라고 한 바가 있다. 홍중은 나름 제 스스로에 뿌듯해하며 심호흡을 하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이상했다. 이상하다. 눈을 뜬 그가 본 것은 나체로 얽혀있는 남자 여럿과 눈이 돌아가서 방아 짓을 하고 괴상한 소리를 지르는 이들이었다. 테이블에는 술병과 주사기가 늘어져있었고 벽에 머리를 치는 이들도 있었다. 정상이 아니었다. 홍중이 들어오자 시선이 집중됐다. 이상한 공기가 한순간에 멈춘다. 그 교성 난무했던 방이 한순간에 거짓말처럼 식어 홍중을 바라본다. 남자가 그를 소개한다.

 


얘는 홍중이고 올해 스무 살이고 처음 왔대.

 


말을 끝으로 나체로 있던 이들이 환하게 미소 짓는다. 쌩아다네. 아다. 우리랑 놀래? 발음이 이상하다. 눈은 초점이 없다. 그때 테이블에 있는 하얀 가루가 눈에 띈다. 여기는, 아니다. 이건 이상하다. 문득 몇 년 전에 봤던 약 관련 사건이 기억났다.그는 주로 청소년과 가정을 맡아 가깝지는 않았지만.마약이라고 하면 모든 의문이 풀릴 것 같았다. 나체로 춤을 추는 남자도, 어딘가 몽롱한눈도, 놓여진 하얀 가루와 주사기도. 고민 끝에 홍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문으로 향하자 나체의 남자 여럿이 따라붙는다. 호러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홍중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변호사 머리는 이럴 때 써먹는 것이다. 룸에는 사람이 여럿이다.그에 반해 그는 혼자다. 몸싸움으로 이길 확률이 0이다.

 


화장실에서 섹스하고 싶어요. 로망이었거든요.

 


형이랑, 지금. 미소 지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반면에 홍중의 심장은 덜컥인다. 일단 밖에 나가면 소리라도 질러 볼 것이다. 거시기를 까고 도망칠 것이다. 몸이 날쌘 편이니 통할 것이다. 남자는 너털웃음을 짓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알약이었다. 그리고 피할 새도 없이 홍중의 허리를 감고 키스를 한다. 목으로 알약이 넘어온다. 이런.. 씨팔.


복도로 오자마자 거시기를 까버리려는 거창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눈앞이 묘하게 어지러웠다. 필시 알약 때문이다. 시도는 했으나 허벅지를 찼고 남자는 비열하게 웃으며 더 꽉 쥐어잡았다.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불행히도 복도에는 개미 한 마리 없었다. 복도에서 스테이지로 가는 동안 머리가 점점 어지러워졌다. 무언가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이다. 남자의 손길은 좀 더 짙어진다. 더럽다. 손을 쳐내보려 했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다. 남자는 기어코 홍중을화장실로 끌고 간다. 화장실로 들어서자 세면대에 한 사람이 있다. 홍중은 소리친다.

 


도와... 도와주세요.

 


소리치자 돌아보는 인영이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이목구비가 꽤나 뚜렷하게 보인다. 아마 멀쩡했다면 홍중의 취향이었을 거다. 그의 직박구리 폴더 속 남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겼다. 남자가 천천히 다가온다. 제발 정상적인 이이길 홍중은 바란다. 홍중을 붙든 이는 당황해서 그를 화장실 칸으로 밀어 넣으려고 한다. 하나. 둘셋. 남자의 입이 떼어진다.

 


경찰입니다. 지금 싫어하는 거 같은데 보내주세요.
싫은데. 내가? 네 말 하나 가지고?

 


홍중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입이 막혔다. 게다가 머리가 빙빙 돌고 몸은 더 뜨거워지기만 한다. 말을 안 듣는다.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 전화하는 시늉을 한다. 아, 네. 형사님. 여기 썸머로 와주세요. 어딘지 아시죠? 그러고는 짓궂게 웃어 보인다.


씨팔. 남자의 전화를 끝으로 홍중을 거칠게 내팽개치곤 남자는 화장실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간다. 드디어 해방됐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싶었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문득 본 남자의 폰은 검은 화면이었다. 전화를 한 적 없다는 듯이.

 


야. 너는 왜 저런 것들이랑 노냐.
….
내가 구해줬다. 다음에 밥 한 번 사.
….
근데 왜 너 눈이 풀렸어? 괜찮냐.

 


몸이 뜨거워.
겨우 한마디 한 홍중은 남자의 어깨를 잡고 엎어진다. 남자는 당황했는지 그대로 화장실 바닥에엎어진다. 일단.. 나가고 보자. 약에 취한 홍중은 몸을 잘 가누지 못했고 남자는 그를 엎고 썸머, 클럽의 밖에 나갔다. 불행히도 남자는 홍중의 집을 몰랐고 이름도 몰랐고 나이도 몰랐다. 눈 앞에 보이는 건 숙박업소였다. 홍중은 그의 뒤에서 계속 웅얼거리며 어지러워만 반복하고 있었다. 헐떡이는 숨이 귓가로 직방으로 전해진다. 보지 않아도 볼에는 열이 올라있을 게 뻔했고.. 같은 남자로서 그의 등을 찔러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마 약을 먹은 듯하다.


…미친 새끼들. 박성화는 욕을 하며 모텔방에 대충 버리고 가기로 했다. 주운 것은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의무다.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그를 침대에 눕혀 놓는다. 클럽 내에서도 평판이 안 좋은 이들이랑 놀고 있기에 맹하거나 맹랑한 이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성 싶다. 의외로 똑 부러지고 날카로워 보인다. 솔직히 말하자면 취향의 범주안에 들었다. 새빨간 머리도 흰후드티와 찢어진 검은 진도. 나이는.. 어려 보이지만. 처음 온 것인가. 눕혀 놓은 홍중은 갑자기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박성화는 당황해 방 밖을 나가려고 한다.

 


더워.. 식혀줘. 안고 싶어..

 


그러고는 박성화의 멱살을 대뜸 잡는다. 나랑, 자자. 나 잘해. 아마 뭔 소리를 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아.. 안녕. 박성화는 그것을 뿌리치고 문 밖으로 나가기를 시도한다. 아무리 취향이어도, 모텔까지 왔어도 약에 취한 이를 건드리는 건 아니다. 도리에 어긋난다. 그는 어느 정도의 유교 보이였다. 그러나 김홍중은 문 밖까지 따라붙는다. 눈은 몽롱하고 초점이 없다. 나 밑이 선 거 같아. 제발. 촉촉한 얼굴로 계속 사정하니 박성화는 한 발만 빼주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원래 세상일은 맘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더군다나 무언가를 결심한 김홍중과 엮인다면.

 

 

 

 


***

 

 

 

 


다음 날 아침 김홍중은 처음 보는 곳에서 눈을 뜬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분명 제 방은 아니었고 침대와 욕실만 많이 큰 게 분명히.. 호텔일 것 같다. 그러나 썩 고급지진 않은 게 아마 모텔일것 같았다. 왜인지 허리는 아파오고 맨 몸이다. 그리고 옆을 돌아봤더니. 악. 웬 남자가 있다. 그 역시 맨몸이다. 이것은 아마.. 그의 비상한 머리로도 생각나는 건 … 그렇고 그런 단어뿐이다.


원나잇. 불타는 밤. 처음 보는 남자. 스무 살 초반의. 대충 상황 파악을 완료한 그는 테이블 위 메모지에다 이름과 연락처를 남기고 튀려 한다. 바닥에는 옷이 허물처럼 문부터 침대까지 띄엄띄엄 놓여있다. 어쩐지 남사스럽다. 아픈 허리와 어딘가 멍한 정신으로 옷을 다 입고 나가려고 했을때,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디가?

 


쌍꺼풀 짙은 눈이 떠진다. 헐벗은 상체로 홍 중을 차갑게 응시한다. 홍중은 당황해 문을 재빨리 열려했으나 침대에서 뛰어나온 남자에 의해 저지당했다. 진실은 밑에 덜렁되는 남자의 것에 시선이 팔려서 걸음을 멈춘 것이다.

 

일단 바지는 입고 말하자.

 


남자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는 바닥에 허물마냥 놓인 바지를 주워 입고 침대 위에 앉는다. 김홍중은 가만히 서있다. 남자가 그를 올려본다.그 시선이 참으로 처량해 어젯밤 일이 잘 기억은 안나지만… 어쩐지 죄인 된 기분이다.

 


기억 안 나?
이름이랑 연락처는 남겨놓았고.. 나중에 말하자.

 


뒤꽁무니 빼려는 홍중을 향해 남자가 말한다. 네가 싫다는 나 붙잡고 그거 했잖아.. 내가 거부했는데도 옷도 벗기고 팬티까지 벗겼으면서. 나는 처음이었단 말이야. 게이클럽에 다녔어도 패팅까지밖에 안 했다고. 문고리를 잡던 홍중은 어딘가 찔려 그를 돌아본다. 그의 말에 기억이 갑자기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게이클럽에 갔다가 어떤 미친 새끼한테 걸린 일. 경찰한테 구해진 일. 그리고 모텔방에 얌전히 눕혀준 그의 목깃을 잡고 입술을 박치기한 일. 이건 아니지 하는 그의 옷을 벗기고 한 발 빼준 그를 강제로 눕힌 일. 그리고 더해줘.. 성.. 야? 멈추지 마. 빨리.. 온갖 야동에서 볼 법한 원색적인 말이 하나하나 생각난다. 분명 자신의 목소리다.


홍중의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달아오른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 그러나 생각해보니 자신은 약에 취해있었다. 게다가 박힌 것 같기도 하다. 쌍방 과실인가?

 


나도 좋아서 한 거 아니거든.
좋아했잖아.
…..
나도 처음이었는데.
정말 능숙했으면서. 구라도 참..

 


지금껏 어떻게 지켜온 순결인데.. 남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홍 중의 머릿속에서 계속 울린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었단 말이야. 홍중의 취향인 얼굴로 서글프게 말하니 할 말이 없다. 분명 당한 것은 자신이나 따지고 보면 덮친 것은 저이고… 남자는 계속해서 억울함을 주장한다. 따먹혔다. 그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이었다. 무언가 책임져야 할 것 같았다. 은원은 확실하게. 그의 사십 인생 모토였다. 이내 땅을 파고 들어갈 듯한 남자를 향해 홍중은 한 마디를 내뱉고 만다.

 


아 그럼 만나보면 될 거 아니야.

 


이렇게 스무 살 어린놈이랑 만나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박성화고 멀끔하게 생겼으며 얼굴과는 다르게 굉장히 말랑한 성격을 가진 듯싶다. 아직 아는 것은 그게 전부다.

 

 

 

 


***

 

 

 

 


박성화는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잘했다. 밥 먹자는 연락일 때도 있었고 영화 보러 가자는 것도 있었다. 처음 같이 보러 간 영화는 공포영화였다. 분명 그런 건 껌이지! 를 외치던 박성화는 김홍중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나중에는 저릴 지경이었다. 높지 않은 목소리로 새된 비명도 잘 질렀으며 놀랄 때마다 몸을 조금 움츠렸다. 그게 은근히 깜찍해서 어깨를 몰래 잡았더니 질겁하는 꼴이 웃겼다.


만나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아는 것이 늘어났다. 박성화는 입맛이 저보다 늙었다. 맨날 아침햇살이고 미숫가루 같은 거를 마셨다. 그런 주제 베라는 레인보우 셔벗을 좋아한다. 흔치 않은 취향이라 반가웠다. 한 번 홍 중의 집에 왔을 때는 갑자기 청소를 해주었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듯싶었다. 툭하면 조는 홍 중에게 어깨를 빌려주었고 술에 취하면 평소에 못한 말을 한다. 처음 마셨을 때 한 말은… 너네 집 더럽더라였다. 나쁜 놈. 그래서 인터넷에서 본 신조어를 말했다. 너는 킹왕짱 말을 나쁘게 하구나. 이때 박성화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10년 전에 쓰이던 말이란 걸 알게된 것은 다음 날의 일이다.


멋진 레스토랑에 가서 스테이크를 썰 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박성화가 묻는 것이다. 우리 뭐하고 있는지 알아? 밥 먹는 거? 성의 없는 홍중의 답에 박성화의 얼굴이 급격히 침울해진다. 데이트잖아. 박성화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입에 넣고 질겅인다. 갑자기 와인도 두 모금은 마셨다. 참고로 그는 술을 못했다. 잠시간의 정적이 지나고 말한다. 레스토랑에는 바흐의 무반주첼로 모음곡 2번 D단조가 흐르고 있다.

 


넌 나 어떻게 생각해?
아무 생각 없는데.
그래?
.... 난 너 좋아하는 거 같은데.

 


김홍중의 얼굴이 벌게진다. 귓불부터 볼까지 물든다. 홍중은 제 얼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떤 포인트인지는 모르겠으나 박성화가 그를 좋아한단다. 그의 목표를 이룬 셈이다. 그러나 하나가 찔렸다.

 


너랑 못 만나.

 


박성화의 표정이 급작스레 변해간다. 두근거리던 소년의 얼굴은 금방 침울해진다. 애써 입꼬리를 올려보지만 차마 다 숨겨지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홍중의 눈에 빤히 보인다.

 


… 싫어? 내가.

 


다 고칠게. 박성화는 불쌍하게 말한다. 김홍중은 당장이라도 좋아! 만나자라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무 말 않고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인다.


출생: 198n 년.


박성화의 눈이 동그래진다. 신분증의 숫자와 김홍중의 얼굴은 계속해서 번갈아 응시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시크릿가든 알지. 거기서는 물 먹고 몸이 바뀌었잖아, 나는 나이가 젊어졌어.
그래서 네가 나랑 만나기에는 너무 아깝잖아. 아직 젊은데.


홍중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먼저 일어날게. 박성화는 혼이 나간 얼굴로 앉아 있다. 정신을 못 차렸는지 김홍중을 잡지 않는다. 레스토랑에서 나오고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사실 좀 많이 슬펐다.
잡아주지. 병신이.


사실 박성화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나왔는데 김홍중과 다른 엘리베이터를 탄 덕에 엇갈린 것이다.
김홍중이 알면 통탄할 일이었다.

 

 

 

 


***

 

 

 

 


그 뒤로는 뭐, 별 거 없었다. 혼자 이별의 슬픔에 광광되던 홍중과 무슨 일인지 끝없이 생각하다가 알바도 지각한 박성화가 있었을 뿐이다. 집에 있으면 청소하던 박성화 같이 넷플릭스 보면 낄낄되던 박성화가 생각나 김홍중이 잠시 호텔 투숙을 하기로 결심한 것 빼고는 없다. 그리고 집에 찾아가 초인종을 눌렀더니 아무도 안 나와서 혼자 훌쩍이던 박성화가 있다. 심란해진 박성화가 친구랑 술판 벌이며 질질 짜며 말하다가 무슨 소설 쓰냐며 비웃음 당한 일도 있다.


한 편 호텔방에서 투숙하던 김홍중은 왠지 나갈 힘도 없어 룸서비스만 시켜먹었다. 몇 날 며칠을 자고 먹고만 반복하다 보니 어느 날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그래서 나가기로 결심한다. 일단 시작은 호텔 밑 편의점에 가는 것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문득 담배가 당긴다. 자주 피지는 않지만 로펌에 일할 적에 동료가 종종 힘들 때 추천하던 것이다. 지금이 적기인 것 같았다. 사십 평생 쳐다도 안 봤건만. 대충 트레이닝 복에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호텔 앞 편의점에 간다.

 


말보로 레드로요.

 


카운터에 가서 아르바이트생에게 요청한다. 뭣도 모르고 가장 짙은 것을 달라한 것이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르바이트생은 주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하니, 박성화다. 하늘도 참 무심하다. 어떻게 피해온 곳에서 이렇게 껄끄럽게 마주하는지.

 


담배 안 폈는데. 이제 펴… 요?

 


박성화가 애써 웃어 보인다. 볼에 살도 빠지고 눈 밑 그늘도 진해진 게 누가 봐도 힘들어 보였다. 김홍중은 당황해 망부석처럼 서있는다. 존댓말도 갑자기 쓴 게 나이가 생각났나 보다.

 


그냥 가져가.. 요. 몸에 안 좋으니까 많이 피지는 말고..

 


어서 가져가라는 듯 담배를 내민다. 홍중은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카운터 앞에서 그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들어오던 어떤 손님이 그 광경을 보고 뒷걸음질 친 건 박성화만 아는 사실이다.

 


..고마워.너도 술 많이 먹지 말고.

 


사실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그러나 김홍중은 유리 문을 향해 간다. 김홍중의 뒷통수를 바라보던 박성화는 다급하게 말한다. 몇걸음도 안되는 거리다.몇 초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그의 전화번호는 그새 변경되었고 집에도 없었고 다니던 모든 장소를 뒤졌으나 그를 발견하지 못했으므로.이번이 마지막이다.

 


형.나는 네가 80 살이든 여자든 외계인이든 상관 없어요.

 


그는 뼈게이였으므로 나름 큰 결심이었다. 홍중은 뭐에 홀린 듯 목소리에 잡혀 멈춘다. 형이었다 너였다가 호칭은 왔다갔다 했지만 딱히 흠잡고 싶지 않았다.

 


..좋아해요. 아주 많이.

 


한 음절 한 음절 짙은 감정이 흘러넘친다. 미처 꾹꾹 눌러 담았음에도 부족했던 탓이다.

 


형이라고 부르지마. 그냥 야라고 해 .반말쓰고.

 


김홍중의 목소리가 들려온다.아마 그것은 허락일 테다.김홍중은 간질거리는 말을 잘 하지 못했으니까.박성화는 카운터에서 달려나가 퍼런 조끼를 입은 채로 김홍중을 끌어 안았다.수줍게 맞춰지는 입술이다.

 

 

 

 


***

 

 

 

 


약간의 후일담이라면 박성화는 그날 알바에서 잘렸다. 홍중과의 격정의 키스를 누군가 사장에게 찔렀기 때문이다. 무슨 드라마를 찍냐고 혼났다. 그러나 큰 상관은 없었다. 그의 애인은 돈이 무지하게 많았고.. 가족에게 인사도 갔으나 그의 어머니가 그를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이다. 아들이 일이랑 사랑하다 죽을 줄 알았는데 인간을 만나니 다행이라고 했다.그것도 멀쩡한!

성별에는 다행히 큰 신경을 쓰지 않으셨다.


사귀면서 알게 된 것은 몇 가지가 있다. 김홍중은 잠이 많다. 시도 때도 없이 존다.
워커홀릭이다. 현재 직장을 퇴사했음에도 할 일을 찾아다닌다. 요즘은 작곡에 빠졌다는 모양이다. 원데이 클래스와 각종 강의를 집에서 하루 종일 시청한다. 요리를 못했다.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데 은근히 작은 부분에서 허술했다. 쉬는 날에는 영화를 본다. 졸리면 뜻 모를 소리를 하고 안긴다. 영화 취향이 맞지는 않다. 술 취향도 그렇고 학창 시절도 그렇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를 듣는 건 재밌었다. 가끔 싸우긴 하는데 그러면 안절부절못하며 풀어주려는 게 귀엽다. 몇 번 더 깨우자 홍중이 겨우 눈을 뜬다.


성화야. 내가 꿈을 꿨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무슨 샘 울을 먹었는데 젊어진 거야. 너랑 나랑
늙으면 그거나 먹고 또 재밌게 오래 살자.

김홍중은 잠긴 목소리로 눈도 못 뜨고 웃으며 말한다. 잠이 덜 깬 모양이다. 박성화는 김홍중을
다시 눕히고 꼭 껴안았다. 귀엽다. 역시.첫 눈에 반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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