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세 여름.jpg

*trigger warning: 죽음과 전쟁에 대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일곱 살.  

또래보다 키가 컸던 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달리기 시합에 가장 어린 아이들과 함께 참가했다. 흙바닥에 하얗게 표시된 출발선 뒤 나와 함께 서 있던 아이들은 모두 나보다 키가 작고 체형이 왜소하여, 나는 화려하게 비단옷을 차려입은 관객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 아래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어깨를 움츠리고 다리를 굽혔다. 시작을 알리는 붉은 기旗가 들어올려지고, 나는 뒤늦게 앞으로 달려나가려 애쓰지만 이미 늦었다. 오랜 시간 굽히고 있던 다리는 피가 제대로 돌지 않았고 나는 그대로 잘 다져진 바닥에 얼굴부터 처박힌다.  

 

저기, 한 바퀴도 안 되어서 넘어진 건 누구인가? 연蓮국의 태자 되실 몸이라네. 비웃음 섞인 목소리들이 귀에 비수처럼 꽂히고 나는 일어날 의지조차 잃은 채 그대로 눈을 감아버린다. 따가운 한여름의 햇빛이 등과 팔과 목의 피부를 새빨갛게 달구었다. 이번 대회의 주체자이자 시상자인 아버지가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울 때까지 나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상을 나누어주는 내내 힘겹게 얼굴 가득 웃음을 붙들어놓고 있던 아버지는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조금 떨어진 곳의 막사의 그늘 아래 앉아 있던 내게로 향한다. 짝. 뺨이 불에 데인 듯 따가웠다. 일부러 너보다도 어린 아이들과 함께 달리게 시켰더니 그마저도 제대로 해내질 못하는구나. 무예를 숭상하는 나라에서 육체적 부진은 죄로 치부되었다. 칼보다는 붓을, 또래 아이들과 겨루고 노는 것보다는 궁중의 무희들과 어울려 춤을 배우는 것을 좋아하던 나는 연蓮의 기준으로는 지극히 비정상이었다.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보다 못한 여관女官 하나가 얼음주머니를 올리려던 것을 아버지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막아섰다. 내버려 두거라. 여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대로 무인武人 특유의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밖으로 향하려던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에 고개를 반쯤 돌려 내게 명령을 내렸다. 성화 너는 무얼 잘했다고 그리 꾸물대는 것이냐. 어서 따라나오지 않고. 다시 얼음주머니를 들고 내 눈치를 보던 여관은 그 말에 황급히 다시 물러났고, 나는 잽싸게 그녀의 손에서 얼음주머니를 낚아채 뺨에 댄 상태로 아버지의 뒤를 따라나섰다.  

 

 

걷고 걸어 도착한 곳은 또다른 시합장. 이번에 흰 선 앞에 줄을 선 것은 열댓 살은 되어보이는 소년들이다. 길쭉하게 뻗은 팔다리와 얄쌍하게 올라붙은 근육 사이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참가자 하나가 있었다. 아까 나와 겨루던 어린 아이들과 있는 게 더 어울릴 작은 어린애 하나. 작은 얼굴에 큼지막한 눈과 뾰족한 코와 붉은 입술이 오밀조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변에서도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나를 비웃던 목소리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저 아이는 뭐야? 진晉 제국 셋째 황녀의 아들이래.  

 

진의 셋째 황녀라 함은 연인과의 혼인 직전에 신탁의 농간으로 억지로 다른 이와 결혼해야 했던 일화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황녀의 혼인식이 있기 이틀 전에 칠대륙 전부를 주관하는 매랑의 신관이 친히 진 황궁에 행차해, 그녀가 장차 낳을 아이는 그 아버지를 위협할 만큼 위대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알렸다고 했다. 그녀의 신랑이 될 예정이었던 주나라의 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파혼서를 보내어 왔다고, 연나라 시장통의 상인들은 그렇게 말했다. 결국 그 오라비인 지금의 진 황제가 혼기 찬 신하 하나를 골라 혼인을 시켰더랬나. 좋게 끝난 이야기는 절대 아니었다.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붉은 깃발이 나부낀다. 주변의 속삭임에도 의연하게 흰 선 뒤에서 자세를 지켰던 너의 눈은 이제 오로지 결승선만을 향한다. 경쾌한 발놀림은 네 나이의 두 배는 족히 될 법한 선수들을 모조리 따돌리고 춤추듯 마지막 지점을 통과한다. 햇빛을 받아 밝은 눈동자가 나와 아버지가 서 있는 시상대 쪽을 바라본다.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고, 네가 환하게 웃는다. 훨씬 더 잘 뛰어야 할 사람들과 겨루어 당당히 일 등을 차지해낸 너와 달리, 당연히 이겼어야 할 경기를 꼴지도 아니고 기권패로 마무리한 나는 그 상황에서 하등 웃을 이유가 없었으나 어쨌거나 따라 웃었다. 네가 기뻐 보였으니까. 뺨에서 전해져 오는 홧홧한 열기는 그대로였으나 어쩐지 지금은 따끔함보다는 간지러움이 앞섰다. 

 

  

 

 

 

 

 

우리의 두 번째 만남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루어진다. 

 

너를 처음 본 날에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연국을 떠나게 되었다. 시합에서의 일로 밤낮으로 나를 따라다니며 놀려대던 귀족 자제들 중 하나를 밀쳤는데, 하필이면 머리가 기둥의 모서리에 부딪혀 즉사하고 만 탓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사건건 왕실의 일에 트집을 잡으려 들던 대신들로서는 좋은 미끼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나의 그 일을 인질로 잡은 채 왕과 협상을 시도한 그들도 미처 몰랐던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나를 협상의 패로 인정할 정도로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별 고민없이 내 손에 약간의 노잣돈을 쥐여주고, 늙은 유모 하나를 붙여준 채 나를 그대로 추방했다. 그렇게 진 제국 출신의 유모 손에 이끌려 국경을 넘어가 살다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진의 수도 휘명에 위치한 무원武院의 입학 시험을 봤다. 갑자기 무예를 숭상하게 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생계를 위해서였다. 언제까지고 유모에게 의존할 수만은 없는 노릇. 무원에 합격하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그곳에서 먹고 자고 입는 것들을 전부 해결할 수 있었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이들을 길러내는 곳이었기 때문에 달마다 어느 정도 지원금도 나왔고. 다른 이들처럼 따로 합격을 위해 특별히 준비기간을 가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 그러기에는 유모가 운영하는 주막에서 음식을 나르는 일로도 바빴다 - 추방당하기 전에 아버지가 붙여준 선생과 함께 매일 하던 훈련을 기억 속에서 쥐어짜내어 연습을 하고 갔는데 다행히도 결과는 합격. 끝에서 세 번째로 아슬아슬하게 붙긴 했지만 그게 어딘가.  

 

합격생 소집일에 맞추어 무원으로 향한 나는 너른 뜰에 다른 합격생들과 함께 한 줄로 늘어서 바닥만 보고 있다가, 내 바로 앞에 멈추어 선 발걸음에 놀라 고개를 든다. 이 아이가 좋겠구나. 앵두같이 붉은 입술이 열리고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름이, 성화라고 했지? 

 

예. 나는 고개를 조아린다. 원래의 신분이었다면 아버지의 성까지 꼬박 붙여 박성화입니다, 하고 내 이름을 제시했을 터였으나 추방된 이에게는 가족의 성이 허용되지 않았다. 사실상 두 글자가 내 이름의 전부인 셈이었다. 

 

따라오거라. 

 

이젠 아주 먼 옛날같이 느껴지는 그 달리기 시합 당시 아버지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같은 명령이지만 그에 품긴 온도는 그보다 더 다를 수가 없었다. 줄을 벗어나 너의 뒤를 따라가는데 갑자기 조금 앞서가던 네가 발을 헛디디기라도 했는지 비틀거린다. 급히 부축하니 내 팔 안에 반쯤 안기다시피 한 자세가 되어버린 네가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겁이 없구나. 

 

소,송구하옵.... 

 

아니다. 

 

굳은 표정으로 나를 보기만 하던 네 얼굴이 이내 밝은 미소를 띈다. 할 말을 잃은 나는 넋을 놓고 그 미소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다. 예쁘다. 멍한 도중에도 그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만큼은 기억한다. 

 

걱정 마. 이상한 데 끌려가는 건 아니니까. 단지 어머니가 벗으로 삼을 만한 이를 골라보라길래 너를 택했을 뿐이다. 

 

한결 편해진 어투와 미소를 잃지 않은 네 반짝이는 눈을 보면서 나는 체감했던 것 같다. 내 평생의 자리는 너의 곁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빠르게 친해진다. 나이가 같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진에서 황제의 조카이자, 후사가 없는 진 황제의 후계자로 인정받고 살아온 너와, 왕의 직계 혈통임에도 타고난 성정으로 인해 천덕꾸러기 생활을 했던 나는 사실상 큰 공통점이 없었으나 또 그런대로 잘 어울렸다. 스승님의 앞에서 공부할 때에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 영민하던 너의 사소한 실수들 - 나무에서 놀다가 그대로 걸어놓고 들어와버린 동궁의 통행패, 써 놓고 들고 나오지 않은 서책들, 스승님의 거처에 두고 와 버린 먹과 벼루 - 을 챙기는 건 나였고, 내가 난생 처음 접해보는 병법서를 들고 헤메고 있을 때 차분한 목소리로 자, 성화야 - 하며 짚어주고, 기마대는 절대 말에서 내려오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해 가며 말 고삐를 다시 내 손에 쥐여준 것은 너였다.  

 

너를 택한 건 내가 인생에서 잘한 선택 중 하나인 것 같아. 함께 십 년 남짓을 같이 먹고 자고 읽고 구르며 보냈을 즈음, 어느 연회에서 돌아온 네가 약간은 흐릿한 발음으로 나를 보며 처음의 그 날처럼 웃으며 한 말에 나는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내 생각에도 그래. 하지만 평소에는 그 말을 하며 내게 밖에서는 보이지 않을 웃음을 헤프게 흘리는 것에 그쳤을 너는 그날따라 조금 다르게 행동했다. 옅은 술냄새를 풍기며 내가 앉아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온 너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내 무릎 위로 앉아버린다. 십 년간 몸이 많이 자란 나와는 달리 여전히 뼈대가 가늘고 선이 여린 너로서는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나, 처음 보이는 행동에 나는 당황해 읽고 있던 서책도 내려놓고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댄 네 뺨을 콕콕 찔렀다.  

 

많이 곤하면 가서 잘- 

 

쪽. 

 

대답 대신 조금 버석하지만 따뜻한 것이 입가에 닿아왔고, 그것이 내 입술을 살짝 비껴난 네 입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는 내 품에 기대어 곤히 잠이 든 후다. 밖에서는 온통 붉은 옷과 금빛 장식으로 무장한 채 진 제국의 황자다운 차갑고 빈틈없는 모습만 보이던 네가 나에게만 보이는 간극이 좋았다. 심지어 낳아주신 부모님이나 길러주신 스승님 앞에서도 완벽하게 연기를 해내는 너의 그런 모습들은 평생 내 앞에서만 보였으면 싶었다.  

 

술기운과 잠으로 따끈하게 달아오른 작은 몸뚱이를 팔로 안아올려 같이 쓰는 침실로 나르다가 문득 깨달았다. 너무나도 불경한 생각이라 차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으나 그 순간 네가 으응, 성화야, 하고 품 안에서 보채는 턱에 별로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내 나이 열일곱의 일이었다. 

 

 

 

 

 

 

 

 

자존심 대결로 시작했던 전쟁은 또 하나의 자존심 대결로 인해 그 판도가 뒤바뀐다. 문제는 이번에 연루된 두 인물이 둘 다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추방당할 때까지만 해도 갓 젖을 뗀 두 돌짜리 아기였던 내 동생은 이십 년의 세월이 흘러 연국의 적법한 세자로 자리를 잡고 있었고, 칠대륙에서 가장 잔혹하다는 연국의 군대를 이끄는 수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칠대륙 연합군의 총사령관직에 선출된 그는 아버지의 지령이라도 받은 것인지 진 제국을 못 건드려 안달이었다. 적법하게 진 제국의 몫으로 돌아와야 했던 포상품褒賞品을 몇 번이나 총사령관의 직권으로 뺏기는 일이 발생하자 충성스럽던 제국군 사이에서도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연국의 군사력이 강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국력을 비교하자면 제국이 앞서는데, 진 황자는 무얼 하고 있길래 연 세자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냐는 등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개중 몇몇은 내 출신까지 그 일에 엮기도 했다. 듣자하니 황자의 친우가 바로 저 연 세자의 친형이라지. 측근에게 그 말을 전해듣자마자 얼굴이 새빨개진 너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그 길로 연 세자의 막사로 향해 부당하게 뺏긴 것을 돌려주기 전까지는 제국은 전투에서 빠지게 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다시 막사로 돌아와서 씩씩대는 너를 가만히 품에 안았더니 얇은 천 너머로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진다.  

 

내가 잘한 걸까, 성화야? 

 

그에 대한 답은 사실 나도 알 수가 없었기에 나는 답 대신 그를 감싸안은 팔에 힘을 더 주는 쪽을 택했다. 다행히도 너는 금방 평소의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던 전령들에게 군사들에게 전달할 내용을 알리고, 보던 병법서를 마저 보기 시작했다.  

 

 

진의 1황자가 연의 세자에게 한 협박은 생각보다 빠르게 효과를 나타냈다. 빠질 테면 빠져보라고 배짱 두둑한 대꾸를 했다던 칠대륙 총사령관의 자신감과는 달리 진의 기마대가 빠지니 남은 여섯 국가의 연합군은 신이 내렸다던 백마가 이끄는 전차를 탄 신관들을 당해내기는 역부족이었다. 항상 기마대가 먼저 전차들을 처리한 다음 보병대가 처들어가곤 했는데 기마대 병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국이 빠져버리니 승리할 가망이 없었다. 연 세자는 우리의 통보로부터 채 이틀이 안 되어 막사에 찾아와 황자님을 뵙기를 청했으나 우리는 만나 주지 않았다. 몇 번을 청하든 간에 최소 한 달쯤은 이 시위 아닌 시위를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연 세자는 성정이 오만하고 포악하여 이틀로 끝냈다가는 부당한 처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할 사람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 만천하에 똑똑히 알려 놓아야 했다. 설령 총사령관이라 할 지라도 제국을, 그의 자존심과 다름없는 황자를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세 번쯤 같은 일이 반복되니 세자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으나, 그의 발걸음이 끊긴 지 일주일쯤이 흘렀을 때 전령들을 통해 심상치 않은 소식들이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진 제국이 전투에서 빠진 탓에 우리는 이 전쟁에 패배하고 칠대륙은 온전히 신관들의 손아귀 아래 놓일 것이다. 

 

진 제국이 쓸데없는 자존심만 부리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지금쯤 벌써 신관들의 요새를 깨부수고 자유를 얻어냈을 것이다. 

 

진 제국만 아니었더라도. 

 

그 황자만 아니었더라도. 

 

비난의 화살이 빠르게 너 하나에게로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령에게 너 몰래 귀띔받은 나는 결국 결심을 한다. 진의 황자를 전쟁터에 내보내기로. 불만이 최고조에 달한 이 시기에 바로 참전해 저들의 반항할 의지조차 꺾어버리기로.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원거리에서 싸우는 것보다는 군대를 직접 이끌고 적들의 진영으로 처들어갈 인물이 필요하다. 군대를 통솔할 정도의 권력과, 근거리에서 제 몫을 해낼 정도의 실력.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황자의 옷을 내게 주세요. 

 

예? 

 

어서요. 

 

내 말에 놀란 토끼눈으로 나를 살피던 여관은 내 단호한 말투에 이내 고개를 조아리고는 네 갑옷을 내온다. 작거나 짧은 부분이 몇 있어 다리나 팔 일부가 드러났지만 못 입을 정도의 심한 차이는 아니다. 여관의 도움으로 그것을 전부 꿰어입은 나는 헐레벌떡 뛰어온 전령에게 내 뜻을 정한다. 너는 아직 막사 안의 네 거처에서 곤히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벌인 일이다. 네가 깨어나기 전에 돌아올게. 작게 중얼거린 나는 너와 함께한 무수히 많은 수업에서 배운 자세 그대로 말에 올라탄다.  

 

 

전쟁터는 지옥과도 같다. 신관들이 모는 전차에 매인 백마들은 이미 그 털색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구정물과 피와 모래먼지에 절여져 있었고, 이는 그 뒤에 올라탄 신관의 흰 의복도 마찬가지였다. 원래의 계획은 적당히 기마대만 이끌고 나가 전차만 모조리 해치우고 다시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우리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한 신관들은 갑자기 나타난 제국군의 역습에 우왕좌왕하기 바빴으므로 생각보다 진군하는 속도가 빨랐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성벽에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근 오 년을 이 전쟁터의 막사에 살면서도 칠대륙 연합군이 이 성벽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다. 전차를 앞세운 신관들이 지금까지 우리의 공격을 매번 능숙하게 막아낸 탓이었다. 와아아아-!! 우리의 뒤를 따르던 함성 소리가 한층 커지고 사람들이 벽에 달라붙기 시작한다. 깨끗하던 벽은 이내 사람들이 남긴 자국들로 더럽혀진다. 개중에는 벌써 높은 성벽의 반 이상을 오른 이도 보인다. 등에 있는 표식으로 봐서는 연의 정예부대 중 한 명이다. 성벽의 맨 아래는 몸뚱이들이 한데 뒤엉켜 엉망이다. 어떡하지. 나는 그 광경을 보며 고민에 빠진다. 이대로 가다가는 재주는 우리 기마대가 부리고 잇속은 연이 챙기게 생겼다.  

 

성화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관의 말에 나는 잠시간을 더 고민하다가 이내 말에서 내린다. 

 

올라가자. 

 

한 번 우리 편으로 넘어온 기세는 끝까지 밀고 가야 한다. 말을 오래 탔더니 땅에 닿는 다리의 느낌이 이상했지만 어쨌든 칼을 입에 물고 성벽을 돌며 오를 지점을 찾기 시작했다. 위를 올려다보니 아까의 그 연나라 정예군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떨어진 것인지, 혹은 성공적으로 성에 들어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급함에 달달 떨려오는 손끝을 겨우 붙들고 적당한 지점을 찾아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은 지 시간이 흘러서 그런지 군데군데 잡고 오를 구석은 많아 생각보다는 수월했다. 내 양 옆을 흘끗 보니 진의 용 문양이 아로새겨진 갑주들이 곳곳에 보인다. 오늘의 승리는 우리 손에서 나와야 한다.  

 

그때 갑자기 조용하던 성벽의 제일 윗부분에서 밝은 빛이 비치더니 열기가 훅 하고 전해져 온다. 열기와, 빛. 

 

불이다! 

 

저 아래 까마득한 땅에서 누군가가 소리치고 나는 위를 올려다본다. 신관의 흰 옷을 입은 한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한참을 나는 벽의 옆에서, 그녀는 벽의 위에서 서로를 쳐다보기만 하다가 그녀가 먼저 움직인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과는 달리 차가운 빛을 내는 금속이다.  

 

뒤늦게 내 것이 아닌 짧은 갑주가 가리지 못하는 곳을 생각해낸 나는 최대한 몸을 움츠려 등의 딱딱한 갑주를 위로 향하게 하지만 이미 양 팔목을 날카롭게 베고 지나간 은색 단도는 벌써 신관의 손으로 되돌아간 지 오래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세상이 느린 속도로 뒤집힌다. 흰 옷이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진다. 요새의 모래색 벽돌과 그 위를 뒤덮은 핏자국들과 높다랗게 쌓인 시체더미가 한데 어우러져 떨어지는 내 시야를 끝없이 빙글거리며 채운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높은 곳을 욕심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내 몸이 땅에 닿아 형체도 없이 부서지기 직전 나는 간신히 이름 하나를 입에 담는다.  

 

 

홍중아. 

어쩌면 나는, 너를.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