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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날지도 못하고 울지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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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과 함께 감상해주시기 바랍니다.

네버랜드. 꿈과 영원의 섬. 그곳엔 하늘을 나는 아이들과 요정들이 산다. 요정들은 아이들의 친구, 네버랜드는 아이들의 땅이다. 그들의 우두머리 ‘피터 팬’ 홍중은 자신의 의지로 네버랜드에 발을 디딘 다른 아이들과 달리 요정들의 손에 의해 네버랜드로 오게 되었다. 네버랜드의 문지기 요정 ‘팅커 벨’ 성화는 피터 팬과 함께 세상을 돌아다니며 선택받은 아이들이 네버랜드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요정 가루를 뿌려준다.

 

네버랜드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모두 어른이 되기 전, 네버랜드를 떠난다. 어디로 가는지는 떠나는 본인만이 안다. 어쩌면 본인조차 도착지를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남겨지는 이들은 떠나는 이를 배웅하며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겠거니 짐작만 할 뿐이다. 피터 팬이라도 예외는 없다. 전대 피터 팬도, 전전대 피터 팬도 모두 그렇게 네버랜드를 떠났다. 다 커버린 아이들이 떠나면, 피터 팬과 팅커 벨의 초대를 받은 새로운 아이들이 네버랜드에 찾아온다. 네버랜드는 영원히 아이들의 땅이다. 어른에겐 영원히 허락되지 않은 땅.

 

* * *

 

열여덟 살 생일을 맞은 뒤 홍중은 부쩍 불안해졌다. 피터 팬, 홍중은 본인이 태어난 날이 정확히 언제인지 모른다. 요정들의 손에 이끌려 네버랜드에 처음 발을 디뎠던 11월 7일을 생일 삼아 기념할 뿐이다. 진짜 생일을 모르니 언제 정말로 어른이 되는지, 언제까지 네버랜드에 머무를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없다. 홍중에겐 이곳이 고향이고 삶의 터전이다. 저 밖의 세상은 돌아갈 곳이 아닌 타인의 세계다. 아이들을 데리러 갈 때나 가끔 방문하곤 하는, 다른 아이들의 고향. 홍중은 알지 못하는, 알고 싶지도 않은 곳. 어른이 되었다는 이유로 저 밖으로 내쳐지고 싶지 않다.

 

“나는 왜 요정이 아니야?”

어린 홍중이 요정들에게 물었었다. 옹알이나 겨우 하던 갓난아기가 자라 말을 배워, 까만 눈망울을 반짝이며 물어오는 말에 요정들은 애매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문지기 성화가 요정 가루를 아이의 눈앞에 흩뿌리자 반짝임에 정신이 팔려 금세 사그라들었던 질문이다. 그 후 홍중이 네버랜드의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질문은 홍중의 뇌리에서 자연스레 잊혔다. 하지만 이제 홍중은 그때의 질문을 다시 묻는다.

“나는 왜 요정이 아니야? 나는 왜 여기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어?”

요정들은 네버랜드에서 태어나 자라며, 죽을 때까지 네버랜드에서 산다. 홍중은 요정이고 싶었다. 자신이 요정이라면 네버랜드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영원히, 성화와 네버랜드에서 살고 싶었다.

그러나 홍중은 요정이 아니다.

피를 바꾸고 살갗을 뒤집어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홍중은 인간이다.

 

“성화야 난 너랑 헤어지기 싫어.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생일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도 좋아. 나는 여길 떠나고 싶지 않아. 너랑 영원히 여기서 지낼래.”

성화는 언제나 그렇듯 홍중에게 애매한 웃음만 돌려줄 뿐이다. 애가 닳는 사람은 홍중이다. 너는 나와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거야?

“나는 너랑 있기 위해서라면 저 멍청이 후크 선장이랑 영웅과 악당 놀이도 계속해 줄 수 있어. 뭐가 먹이인지 아닌지 구분도 못 하고 뱃속에 시계나 집어삼킨 멍청이 악어만 있다면 후크 선장 제압하는 건 일도 아냐. 알잖아. 내가 지금까지 후크 선장과 팽팽한 척 힘겨루기를 했던 이유는, 그 해적들을 소탕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었던 이유는 네버랜드의 균형을 위해서야. 아이들은 모두 영웅이 되고 싶어 하고, 영웅이 있으려면 악당이 있어야 하잖아. 애초에 그 외팔이가 내 상대가 될 리 없는 거 너도 알잖아. 성화야, 난 너만 있으면 돼. 난 네가 필요해. 날 떠나지 마. 알잖아. 나에겐 너밖에 없다는걸. 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너랑 여기서 영원히 살고 싶어. 나는, 성화야 나는 있지…….”

느릿하게 시작한 홍중의 말은 점차 빨라지고 절박해졌다. 흡사 애걸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우는 걸 누구보다도 창피하게 여겼던 홍중인데. 팔을 뻗은 홍중이 성화의 팔을 잡으려는 순간, 홍중의 몸이 균형을 잃고 기우뚱하였다. 쿠당탕 쓰러지는 홍중에 성화가 놀라 다가앉았다. 홍중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리가, 다리가…….”

홍중의 오른쪽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 홍중은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걸었다. 대장이 절름발이가 되었다며 아이들이 한바탕 배를 잡고 웃었다. 홍중 역시 웃으며 아이들을 응징했다. 다행히 하늘을 날 때는 다리가 멀쩡히 움직였다. 그렇지만 비행에서 다리는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하늘 위를 나는 몸이 이전보다 무겁게 느껴진다는 건 홍중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네버랜드는 기만의 섬이다. 네버, 절대로, 영원히. 영원을 말하면서 요정을 제외한 그 누구도 영원히 머무를 수 없다. 이대로 가다간 다른 이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네버랜드를 떠나야 할 수도 있다. 홍중은 분노하다, 이내 초조해졌다. 늘 하늘을 유영하며 살 수는 없다. 하늘이 주 무대인 새들조차 그렇게 하지 못한다. 땅에서 걸을 수 있는 한쪽 다리를 잃은 후 비행을 하는 몸도 무거워졌다. 다리 둘을 다 잃는다면 아예 하늘을 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성화가 없다면 말이다.

 

팅커 벨이 누구인가? 네버랜드의 문지기다. 팅커 벨의 요정 가루는 다른 요정들의 요정 가루와는 다르다. 아이 어른 상관없이 누구든 잠시간 하늘을 날게 해준다. 이미 피터 팬과 아이들은 후크 선장과 해적단을 골탕 먹일 때 팅커 벨의 요정 가루를 톡톡히 활용한 전적이 있다.

하지만 성화에게 내가 더는 날 수 없으니 요정 가루가 필요하다 어떻게 말하겠는가.

피터 팬은 요정 가루가 없어도 날 수 있는데.

 

네버랜드에는 아이들만이 살 수 있다. 그 누구도 영원히 아이일 수는 없다. 네버랜드의 아이들은 언젠가 자라 네버랜드를 떠난다. 수많은 아이들이 네버랜드를 스쳐 갔다. 그러는 동안 홍중의 곁엔 성화만이 변함없이 남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홍중은 성화가 자신에게 그렇듯 변함없이 성화 곁에 남는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아이와 어른. 네버랜드와 바깥세상. 홍중의 생각이 시계추처럼 양극단을 오갔다. 근래 홍중은 좀처럼 이외의 생각을 하지 못했다.

똑 딱 똑 딱.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렸다. 후크 선장의 천적 악어가 물가를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후크 선장의 천적.

후크 선장.

홍중이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홍중의 곁엔 성화만이 변함없이 남아있지만, 홍중의 대척점에도 변함없이 남아있는 이가 있다.

후크 선장과 해적단.

후크 선장은 어째서 네버랜드에 머무를 수 있지?

후크 선장이 네버랜드의 아이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기에?

홍중의 머리가 팽팽 굴러갔다.

후크 선장은 어른이다. 그러나 네버랜드에 산다.

……후크 선장이 네버랜드에 사나? 네버랜드 어디에?

그 순간, 어떤 깨달음이 불현듯 홍중의 머리를 스쳤다.

 

악어에게 한 손을 잃은 후크 선장은 뭍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후크 선장의 손을 삼킨 악어는 후크 선장의 배 혹은 후크 선장의 냄새를 각인이라도 했는지 후크 선장의 배가 나타나면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듯 네버랜드의 물가에는 항상 문제의 그 악어가 있으므로, 후크 선장의 배는 네버랜드에 절대 닻을 내리지 않았다. 선장이 하선하지 않으니 선원들도 갑판 위와 선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배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꾸준히 악행을 저지르는 뚝심이 대단하다면 대단했다.

배.

후크 선장과 해적들은 네버랜드의 물길만을 다닐 뿐, 네버랜드의 땅을 밟고 살아가지 않는다.

홍중은 요정이 될 수는 없지만, 해적은 될 수 있었다.

네버랜드의 땅만 밟지 않는다면, 홍중은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부터 홍중은 후크 선장의 배를 몰래 지켜보았다. 자신이 정립한 가설에 대한 검증이 필요했다. 하루는 일부러 후크 선장의 갑판 위에서 싸움을 벌였다. 육지에선 관절 대신 쇠토막이 들어앉기라도 한 듯 꿈쩍도 하지 않던 다리가 펄펄 날았다.

“대장 저거 꾀병이었던 거 아냐?”

아이들의 의문 속 가장 신난 이는 홍중이었다.

네버랜드에 머물 방법을 찾았다.

홍중의 눈이 희열로 빛났다.

 

네버랜드에 머물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나이? 후크 선장은 아이가 아니다. 동심? 후크 선장이 어디 동심을 지닌 인물이던가? 네버랜드에 머무는 데 필요한 건 동심이 아니다.

그날 밤, 성화를 앉혀놓고 홍중은 선언했다.

“나도 해적이 될래.”

네버랜드의 밤하늘이 담긴 듯 반짝이던 홍중의 눈동자 속 빛이 사그라들었다.

 

다음 날 아침, 홍중의 왼쪽 발에도 마비가 찾아왔다. 다행히 신발에 가려 아이들 중 누구도 홍중의 왼쪽 발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날부터 홍중은 바닷가에서 살다시피 했다. 네버랜드의 숲에서 통나무를 구해다 뗏목을 엮기 시작했다. 후크 선장의 범선처럼 커다란 배를 엮을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홍중은 조선(造船)에 있어 문외한이었다. 통나무를 자르고 다듬고 엮느라 홍중의 손이 잔뜩 부르텄다. 가시가 박히고, 물집이 잡히고, 살갗이 까져도 홍중은 뗏목 만드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네버랜드에 머무를 방법을 찾아서인지 뗏목에 쓸 나무를 구하러 네버랜드의 하늘을 가르는 몸이 전처럼 무겁지 않았다.

 

성화는 그 모든 과정을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았다. 거처를 오가는 시간조차 아까웠는지 홍중은 아예 바닷가 옆 동굴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생활했다. 대장이 두문불출하자 걱정이 된 아이들 몇몇이 바닷가를 찾아왔지만, 홍중이 귀찮게 굴지 말라며 휘휘 손을 내저어 모두 쫓아냈다. 홍중은 그들에게 있어 다리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가 아닌 언제나 멋진 대장, 피터 팬이고 싶었다.

 

“성화야 우리 해적이 되면,”

“…….”

“후크 선장을 쫓아내고,”

“…….”

“아니지. 그럼 아이들이 심심해할 테니까…. 그러면 그냥, 바다의 무법자가 되자. 보물 같은 건 찾아봤자 쓸모도 없으니까 그냥 네버랜드나 빙빙 돌면서 살자. 애먼 곳으로 항해를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곤란하잖아.”

밤이면 홍중은 모닥불 하나를 피워 놓고 성화의 어깨에 기대 잠들었다. 성화가 편히 누워 자기를 권해도 홍중은 고집스레 성화에게 기대 잠을 청했다. 누워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두 다리가 전부 마비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까 불안해서 그런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일주일쯤 실랑이를 벌인 후엔 성화도 별말 없이 홍중에게 어깨를 내주었다. 홍중이 자는 동안 성화는 백사장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밤새 불과 홍중의 곁을 지켰다.

 

장작을 넣어 불의 크기를 키운 성화가 무릎께에 놓인 홍중의 손을 바라보았다. 칼과 활을 잡는 탓에 보드랍지는 않았어도 나름 곱던 손이 엉망이었다. 홍중의 손에 가득한 상처에 속이 상해 그 위로 요정 가루를 잔뜩 뿌렸다. 홍중이 뗏목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손이 상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치르기 시작한 성화만의 작은 의식이었다. 다친 손 위로 반짝임이 가득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요정 가루는 달빛을 받아 반짝이기만 할 뿐 홍중의 상처를 낫게 해줄 수 없다. 홍중이 어른이 되는 걸 막아줄 수도 없다. 홍중은 요정 가루 없이도 하늘을 날 수 있으니 정말로 그 어떤 도움조차 되지 못할 터였다. 부서지는 파도와 타오르는 모닥불. 동굴의 맞은편 벽에서 희미하게 일렁이는 둘의 그림자. 고요한 달빛 아래 반짝이는 홍중의 손. 곁에서 새근대는 홍중의 숨소리. 그 모든 것들 가운데서 성화는 아득한 무력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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