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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그 곳에서.jpg

 

하나. 오전 7시 30분, 오후 1시, 저녁 6시 30분. 시간에 맞춰 식사를 준비 할 것. 그리고 약을 잊지 말 것.

     - 아침 -    과일잼을 곁들인 토스트, 탄자니아킬리만자로AA 원두로 내린 커피. 혹은 계절에 맞는 차.

     - 점심 -    한식 위주의 가벼운 식사. (맵고 짜지 않은 음식 위주로 준비할 것.)

     - 저녁 -    식사 여부를 묻고, 원하는 메뉴를 해드릴 것.

 

 아침 7시 23분. 검은 버틀러 정장을 갖춰입은 남자가 은빛 키친 트롤리를 끌고 홀 안으로 들어선다. 홀 가운데 위치한 하얀 대리석 테이블 옆에 멈춘 남자는 제 할일을 시작했다. 옅은 회색의 테이블 매트. 오렌지 마멀레이드 잼. 갓 구운 토스트. 나이프. 포크. 냅킨. 한치의 오차도 없이, 오와 열을 맞춰 내려놓은 식기들 위의 음식들은 아직 열기가 식지 않았지만, 어제도, 그제도 이 식사는 주인을 찾지 못한채 버려졌다. 오늘도 그렇게 될까?

 정확히 7시 28분. 남자의 주머니에서 지잉- 하는 짧은 진동이 울렸다. 남자는 트롤리를 주방에 둔 후, 곧장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올라 오른쪽으로 몸을 틀면 보이는 두 개의 하얀 문. 그 중에서 왼쪽 방. 방 앞에 선 남자는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2주째였지만 아직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던 그 때, 타이밍 좋게 울리는 진동. 7시 30분이었다. 남자가 조심히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는 방 안. 

 남자가 조심스레 방 문을 열었다.

 

둘. 방 안에 있는 가구 및 물건의 위치는 절대 옮기지 말 것.

 

 방 안으로 들어서자, 1층과 마찬가지로 온통 하얀색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통창을 통해 아침햇살이 마지막으로 쏟아지는 그 곳에, 이 저택의 주인이 잠들어 있다.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 속 하얀 침구에 파묻혀있는 그는 얼핏 보면 인형을 뉘여놓은듯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들리는 숨소리로 살아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병이라고 했다. 기면증의 일종이지만, 한 번 잠이 들면 오래 자는 병. 누가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고, 죽을만큼의 고통을 준다 해도 일어나지 못하는 그런 병이라고 한다. 치료방법도 없는 병. 그렇기 때문에 환경 변화에 예민하다고 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어야만 한다고 했다. 주인이 잠들어 있는 방을 조용히, 조심히 청소 할 때마다 그 점을 되새기고 있었다.

 

셋. 그가 묻는 말에 있는 빠르게,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답변 할 것.

 

 

  햇살이 얼굴 위로 쏟아져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다. 초여름 볕이라 따가울텐데... 분명 그는 자고있을테니 느끼지 못할건데도, 남자는 창가로 다가가 베일 커튼을 쳐 햇빛을 가리려고 했다. 

 

"...너, 누구야?"

"아..."

 

 남자의 뒤에서 얇은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침대 위에서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그'가 깨어났다.

 

 

 

 

-

 

 

 

 온통 하얀색으로 가득했던 방 안에, 멈춰있던 공기가 다시 순환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침대 위에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자신과 남자뿐이라는걸 알자마자 이불을 거두었고, 자신의 부름에 굳어버린 버틀러 정장의 남자가 천천히 뒤돌았다. 분명 자신이 잠들기 전에는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방 안에서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남자를 보며 현재를 파악하고 있는 사이, 남자는 그의 얼굴을 보며 다시 한 번 숨을 흡- 들이쉬었다. 신기하리만큼 하얗던 그의 얼굴에도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잠 들어 있을때와는 차원이 틀렸다. 눈을 감고 있을 때는 인형같은 느낌이었다면, 눈을 뜬 모습은 잘 빚어 놓은 도자기 인형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파악하는 사이, 먼저 파악이 끝난 그가 몸을 일으키며 남자에게 다시 물었다.

 

"누구냐고, 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의 두번째 물음에 남자는 정신을 차렸다. 세번째 주의사항. 빠르게, 솔직하게. 남자는 자세를 가다듬고 정중하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집사로 새로 일하게 된 박성화라고 합니다."

"...또 바뀌었나보네."

 

 그는 이전의 집사가 무슨 이유에서 나갔는지, 왜 성화가 오게된건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런것들도 이젠 익숙하다는 듯, 눈을 한번 꾹 감았다 뜬 그가 성화를 지긋이 쳐다 보았다.

깔끔하게 빗어 올린 까만머리, 까만 버틀러 제복이 잘 어울리는 큰 키, 그리고 앳된 얼굴. 아제 막 사회생활에 나온 20대 청년의 얼굴이었다. 어떤 질문이 나올지 긴장하고 있는 성화에게, 그는 24시간, 365일을 붙어있어야 하는 이 집에 왜 오게 된건지 조차 묻지 않았다. 그저 무미건조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그가 성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

"후우.. 오늘 며칠이냐고."

"아, 죄송합니다. 오늘은 2020년 6월 14일 입니다."

"2달 3일... 양호하네."

 

 성화의 늦은 대답에 그가 약간 미덥지 못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이내 침대 위에서 빠져나오려는데, 갑작스런 움직임에 몸이 적응을 못한건지 순간적으로 휘청인다. 성화가 반사적으로 그에게 다가가 휘청이는 어깨를 붙잡고 부축했다. 그러자 성화의 손을 탁- 하고 뿌리친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 싶어 성화가 뒤로 한발자국 물러났다. 

 

"이전 집사가 이야기 안 해? 나 환자 취급하는 거 싫어한다고."

"죄송합니다. 그러신 줄 모르고..."

"....나가 있어."

 

 지금 방금 일어난 사람이라고는, 오랫동안 잠들었다 일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목소리로 그가 말하자, 성화는 빠르게 꾸벅 인사를 하고 그의 방을 빠져나왔다. 큰일났다. 성화는 빠르게 1층으로 발을 옮겨 식당에 셋팅해 놓은 식사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커피는 아직 식지 않았지만, 토스트가 식었다. 다시 토스트를 빠르게 준비해서 셋팅해놓자, 저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막 일어났을 때보다 한결 말끔해진 얼굴로 내려 온 그가 식탁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토스트는 그렇다 쳐도, 커피에 대해서는 예민하단 소리를 들었는데, 별말 없이 먹는 그를 보며 성화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가는 찰나에, 자신의 곁에 서서 대기하던 성화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아까는 미안했어. 자고 일어나면 예민해서."

"아닙니다. 제가 더 주의하겠습니다."

"성화라고 했지? 잘 부탁해. 언제 그만둘지 모르니, 미리 미안하다고도 해 둘게."

 

 점심은 안 먹을게. 하며 일어난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성화는 긴장이 풀려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버리고 말았다. 

 

 

 

 

 #

 

 

 

 

 K가 깨어난지 어느덧 35일째였다. 

 그는 성화에게 자신을 'K'라고 부르게 했다. 작가로서의 그의 필명이기도 했지만, 본명을 알려주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것 같았다. '소설가 K'. 아무리 책이랑 가깝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름이었다. 그가 책을 내면 언제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사회현상이 되었다.

 그만큼 문체와 필력이 많은 사람들을 빨려들게 하는 매력이 있는 책을 쓴 K였지만,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안겨주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K는 이 병으로 인해 글을 쓰게 되었고, 자신이 알려지게 되면 글보다는 자신의 병에 대해 주목이 되는 것이 싫어 숨었다고 했다. 

 그가 깨어나면 조금이라도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던 성화의 일상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K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식사시간 이외에는 별다른 지시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처럼 집사의 업무를 했다.

 K를 위한 업무는 일반적인 집사의 업무라기 보단,  집안의 전체적인 일을 다 해야했다. 자신을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안되기 때문에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집사 한명만을 둔다고 했다. 그만큼 월급이 많긴 했지만, 집의 A 부터 Z까지 다 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많은 월급에 들어왔다가 빠르게 나간다고 했다.

 이전에 일 했던 사람은 외로움에 못 견뎌 나간다고 했다. 

 그 이전 사람은 주인의 재산을 횡령하다가 걸려서 쫓겨났다고 했고. 

 그 이전의 이전 사람은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2년 이상을 버티고 나간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원체 혼자서 생활하는 것이 익숙했던 성화에게는 딱히 힘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씩 다가오는 적막함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럴때는 그냥 무슨 일이든 닥치는대로 하는게 좋았다. 이 넓은 집에서는 할 일이 많았기에, 종종 돌아다니면서 소일거리를 찾아서 했다. K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어쨋든 지금은 성화가 집사이기에 하고싶은대로 놔두었다.

지잉- 

 저녁식사를 준비하려던 성화의 알람이 울렸다. 처음으로 울린 알람. K였다. 성화는 매려던 앞치마를 다시 제자리에 두고 2층으로 발을 옮겼다. 2층 오른쪽 방. K의 서재 앞에서 옷 매무새를 가다듬은 성화가 방문을 노크했다. 

 

"부르셨습니까?"

"아, 응. 잠시만... 저기에 앉아봐."

 

 안경을 쓴 채, 데스크에서 작업을 이어가던 K의 손이 멈추었고, 쇼파로 와 앉았다. 맞은편 앉아 있는 성화가 보기에도 평소보다 표정이 좋지 못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K가 입을 열었다. 

 

"이따 손님이 올 거야."

"네."

"그 때, 이 방 근처로는 오지 말아줬으면 해."

"...네?"

"...별로 보고싶지 않은 사람인데 온다고 해서 그런거니까. 부탁 좀 할게."

"그럼 뭘 좀 준비 할까요?"

"됐어. 그냥 차 정도면 돼. 차만 내오고 그냥 나가있어."

 

 표정이 굳은 채 이야기를 하는 K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어벨이 울렸다. 안 그래도 굳어버린 K의 몸이 한껏 굳어버렸다. 성화는 K의 방에서 나와 손님 맞이 후, K가 말한대로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손님들이 격분한 표정으로 집을 빠져나갔고, K는 여태 한번도 말하지 않았던 주문을 했다. 

 

"와인을 가져와"

 

 K의 말에 와인셀러에서 와인을 꺼내고, 간단하게 카나페와 카프레제를 만들어 K의 방 안 테라스로 가던 성화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달빛에 비춰진 제 주인의 모습은 어느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던 성화를 깨운건 K의 목소리였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알아?"

"마녀의 저주로 물레에 찔려서 100년간 잠드는 그 사람이요."

"그 사람이요, 하니까 웃긴다. 응. 난 내가 그 마녀의 저주에 걸린거 같아."

 

 K가 천천히 와인을 들이켰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들은, 술김에 말하는 것이며, 잊어달라고 했다.

 그저 잠이 많은 정도였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잠이 많은 아이. 그러나 어느날부턴가 자고 일어나면 사람들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2~3일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일주일, 한달. 병원을 가도 병명은 기면증이었다. 좀 심한 기면증. 평소에는 잘 자고, 잘 일어나지만,  약이나 심리치료를 통해 고쳐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워낙 치료가 힘든 병이었기 때문에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점점 기간이 늘어나더니, 나중에는 2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고 했다. 그 사이에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집안은 욕심많은 친척들로 인해 풍비박살 났다고 했다. 어머니와 K가 건질 수 있었던건, 별장이었던 이 하얀 집 뿐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몇 달을 또 깨어있다 잠들었고, 다시 깨어났을땐 어머니도 아버지의 곁으로 가셨다고. 그렇게 본인에게 남겨진 유산과 글솜씨로 그 많은 세월을 살아 왔고, 결국에는 이렇게 집안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남겨졌다고 했다. 

 아까도 자신의 남은 재산까지 노리던 사람들이 찾아온 것이라며 한숨을 쉰 K는 오늘따라 이상한 자신의 상태에도 술김이라기엔, 왜 이런 말을 만난 지 얼마 안된 사람에게 하는건지. K 본인 조차도 모르지만, 오늘은 그저 이야기 하고 싶었다. 불쌍하기도, 부럽기도, 어쩌면 사랑스러워 보일수도 있는 K의 모습이 성화의 눈에 담겼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는 K님이 부럽습니다."

"난 저주덩어리라니까. 부러워할 것도 없어. 나를 구해줄 왕자님, 아니지 나는 그럼 누굴 찾아야 돼? 여자 성기사?"

"그래도 이렇게 누군가의 보살핌과 관심을 받으며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전 처음부터 주변에 아무도 없었어서요."

 

 아-, 하는 K의 탄성이 들렸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성화의 아픈부분을 들춘 것 같아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머뭇대는 사이, 성화는 자신의 앞에 놓인 와인을 한모금 마셨다.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니었지만, 혼자라는 것이 힘들긴 했지만, 불만은 없었다. 어쩔수 없지 않은가. 없는 부모나 가족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살아왔고, 이제 처음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된 성화였다.

 누군가를 보살피면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그 속에서 따뜻함을 느끼는 것도 K를 통해 배웠다. 그랬기에, 성화는 K를 오랫동안 곁에서 모시고 싶었다. 그게 설령 K에게 부담이 될 지라도. 와인을 다시 한모금 마신 성화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는 K님 곁에 오래 있을 수 있어요."

"...그건 고마운 말이네."

"진짠데. 오래 모시겠습니다."

"월급 많이 달라는 소리로 알게."

 

 달이 비추는 테라스에서 두사람의 대화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마시다보니 어느새 와인 보틀의 2/3을 비웠다. 성화는 멀쩡했지만, 약때문에라도 술을 자제하고 있던 K의 두 볼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이 감기는 속도도 느려지자, 성화가 K의 정신을 깨우기 위해 다시 화제를 전환했다.

 

"술 약하세요?"

"잘 안..마시긴...ㅎ.ㅏ니까..."

"그럼 그만 드실래요?"

"응.. 잘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K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성화가 그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가서는 이내 이불을 젖혀 K가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잠자리를 보았다. 

 

"박성화."

"네."

"이름 부른 건 처음인 거 같네..."

"그러네요."

"잠깐 가까이 와봐."

 

 K의 부름에 침대 곁으로 가까이 다가간 성화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K가 제 얼굴선을 손을 쓸어내렸고, 그의 손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소름과 열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처음 느껴보는, 하지만 낯설지 않은 감각에 성화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K가 성화의 목에 팔을 감아 제 곁으로 끌어 당겼고, 

 

"고마워. 내 이름은 김홍중이야."

 

 K가 자신의 이름을 말해줌과 동시에 성화의 볼에 촉- 하고 입술을 붙였다, 뗐다. 그와 동시에 성화의 눈빛이 변했다. 고개를 들어 K, 아니 홍중과 눈을 맞춤과 동시에 격하게 입술을 탐했다. 

 

 

 

 

#

 

 

 

 

 그렇게 며칠, 아니 며칠이라고 하기엔 좀 지난 어느 날.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정원을 산책하던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정원 한 구석에 성화가 만들어 놓은 작은 꽃밭이었다. 정원 이곳저곳에 흩어져 피어있던 이름모를 꽃들을 모아 만든 작은 꽃밭.

 그 앞에 앉아 꽃을 바라보며 웃는 홍중과 성화의 모습은 여느 연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성화가 이름 모를 흰 꽃을 따서 홍중의 귀에 꽂아주자 홍중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버렸다가, 이내 어설프게 웃는다. 그 모습에 성화도 웃으며 말한다.

 

"예쁘네요."

"이게 뭐야... 기분 되게 이상해."

"진짜 예뻐요."

"...네가 해줘서 그냥 가만히 있는거야... 알지?"

"네."

"...아. 성ㅎ..야.."

 

 갑작스레 흔들리는 목소리로 성화를 부른 홍중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풀썩 주저 앉아버린다. 놀란 성화가 홍중의 허리를 받쳐들어 쓰러지는 것 만은 막았지만, 이미 홍중의 몸에 힘이 빠져가고 있었다.

 아, 이거구나. 갑작스레 잠들 것이라는 말은 홍중에게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벌어질 줄은 몰랐다. 성화는 처음보는 병의 실체에 많이 놀랐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놀란 표정을 지으면 홍중이 상처받을까 살짝 웃어보였다. 힘이 빠져 쳐지는 몸에 힘을 주고, 감기려는 눈꺼풀을 어떻게든 들어올려 성화와 눈을 맞추려는 홍중의 귓가에 성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워하지 마요."

"....."

"당신이 눈 뜰때, 내가 꼭 옆에 있을게요. 내가 없어도, 알죠? 알람 누르면 나 금방 달려오는 거."

"..으..ㅇ.."

"잘 자요, 홍중."

 

 성화가 품에 안아 등을 토닥여주자, 홍중은 그제서야 힘을 주고 있던 몸에 힘을 풀며 온전히 몸을 맡겼다. 더이상은 무섭지 않았다. 눈을 뜨면 성화가 있을거란 확신에. 그렇게 잠이 든 홍중을 방으로 옮겨 침대 위에 뉘였다.

 

"잘자요, 나의 잠자는 숲 속의 왕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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