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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과 함께 감상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둠이 짙게 깔리고 달빛이 환하게 비추는 밤. 그때 우렁찬 갓난 아이의 소리가 들려오는 집안이 있었다.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는 방 밖에 서서 불안한 듯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기다리다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보이는 땀에 젖은 부인과 그 옆에 두꺼운 천에 쌓여져 색색 숨을 내쉬는 갓난 아이가 보였다. 남자는 부인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곤 아이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남자는 아이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유모는 부인과 아이가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달라고 했다. 남자는 밖으로 나와 환하게 빛나고 있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달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는 나무에게 시선을 뒀다, 그 위엔 어느 남자가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며 서있었다. 큰 키에 어두운 밤 하늘처럼 검은 머리와 들고 있던 부채 덕에 얼굴의 반은 가려졌지만 심해를 담은 듯한 진한 눈동자는 처음 보는 이도 충분히 홀릴 만한 준수한 외모를 가진듯한 사내였다. 꽤나 앳돼 보이는, 나리가 아닌 도련님이라 불러야 싶은 그런 나이 대의 얼굴이었다. 그 남자는 부채를 탁, 하고 접더니 순식간에 남자의 앞으로 다가왔다. 

 

 

"드디어 아이가 태어났구나," 

"예, 그렇습니다." 

"정말 괜찮겠어? 저 아이가 자랄수록 복이 옮겨지게 되면 넌 한없이 불행해질 텐데." 

".. 저희 아이를 잘 챙겨주십시오. 그거면 됐습니다." 

"그래, 너에겐 빚진 게 있으니 그리하도록 하지. 고마웠어." 

"빛이라뇨, 평생 충분히 갚고도 넘칩니다. 제가 감사할 따름이지요." 

"역시 넌 내가 만난 인간 중에 제일 착하다니까, 저 아이는 내가 성심 성의껏 모시도록 하지." 

"예, 감사합니다 나리" 

"그럼 이제 작별 인사를 해야겠다, 다음 생엔 더욱더 행복하게 삶을 시작했으면 좋겠구나, 잘 있거라 주홍." 

"예,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나리, 아무쪼록 제 자식을 잘 부탁 드립니다." 

남자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밤바다를 담은 듯한 진한 푸른색 도포를 펄럭이며 사라졌다. 남자가 사라지고 선선한 바람이 불며 나무에서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지곤 아름답게 공기를 가로질렀다. 그 중 유독 붉은색을 띄운 꽃잎 하나가 살랑살랑 바람을 타며 아이가 있는 방 창문을 향해 날아가곤, 그 꽃잎은 곧 방 안으로 들어가 아이의 이마 위로 떨어졌다. 남자가 떠난 곳에 남은 아버지는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제발 우리 아이만은 지켜주십시오 나리. 

 

** 

** 

 

"좋은 아침입니다 ~" 

"홍중이 왔구나, 어서 여기 국밥부터 나르거라, 오늘은 아침부터 사람이 많네." 

"네네, 요새 장사 잘 되네요. 여기 주세요." 

"그래, 오늘도 수고하거라." 

 

살짝 작은 체구에 평범한 사람에겐 찾아볼 수 없는 진한 붉은색의 머리카락, 은하수를 담은 듯한 반짝이는 눈망울, 얄팍하고 높게 뻗은 코와 맑은 호선을 그리는 입까지. 홍중은 누가 봐도 출중한 외모를 가진 아이였다. 하지만 화려한 외모와 다르게 그의 옷은 허름하고 구멍이 이리저리 뚫린 옷이었다. 홍중은 어릴 적에 부모님과 친척까지 다 돌아가신 뒤같이 살아남은 유모와 살다 유모도 결국 없어져 버린 그런 불쌍한 아이였다. 부모님의 마지막 기억은 불타는 집에서 나에게 어서 가라며 소리치는 장면 뿐, 어린 홍중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홍중이 일어나 보니 자신은 작은 오두막에 있었고, 그 옆엔 누워있는 저를 보며 서럽게 울고 있던 유모였다. 며칠을 서럽게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홍중은 어렸음에도 성숙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도 살아남아야지, 하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유모를 따라 어릴 적부터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나 남은 유모도 자고 일어나니 없어져 있었다, 그때 당시의 나이는 고작 15살,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힘들었던 두 번째 이별이었다. 자신도 그냥 콱 죽을까 하고 몇 번 시도를 해봤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무언가의 방해로 실패하곤 했다. 결국 홍중은 자신이 살아야 할 존재일까 하고 생각하곤 다시 일을 나가 열심히 성인이 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었다. 

매일매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일하고 밥 얻어먹고, 하루 종일 일해서 몇 푼만 받고 살아갔다. 하지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인생 동안 홍중은 그저 평화롭고 순탄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잘 생각하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돈도 제때 제때 딱 필요한 만큼 모아졌고, 별로 배고파 하던 일도 없었고, 나쁜 사람 하나 만나지 않았다. 홍중의 집은 언덕 꼭대기에 올라가면 있는 유모와 살던, 홍중의 부모님이 남기신 단 하나에 집이었다. 밤에 일을 끝마치고 힘겹게 올라와 평상에 벌러덩 누워 어두운 밤하늘에 별을 보며 잠을 드는 게 홍중에 유일한 하루에 행복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주막에서 일하던 홍중은 이리저리 바빠 정신이 없는 탓에 실수로 들고 있던 뜨거운 국밥을 옆에 앉아있던 손님에게 흘렸다. 손님은 하필 성격이 더러운 소위 말하는 깡패 같은 성격이었다. 화들짝 놀라 안절부절 하며 연신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했다. 곧 닦을 것을 가져온다고 말한 뒤 홍중은 주방으로 향하려고 했지만 얼굴이 울그락 붉으락 거리며 화가 나있는 손님에게 붙잡혔다. 홍중은 처음 겪는 일에 무서운 듯 몸을 한껏 움츠렸다. 제가 닦을 거 어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잠시 이것 좀.. 남자는 홍중의 말이 들리지 않은지 씩씩대며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다. 점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주변은 좀 말려보라며 다들 서로를 부추겼지만 아무도 홍중을 선뜻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아무 대답도 없이 떠는 홍중이 거슬린 건지 손님은 손을 위로 확 들었다. 홍중은 자신이 한대 맞는구나 하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살짝 뜨니 보이는 큰 키에 사내가 제 앞을 막고 있었다. 남자는 진한 푸른색 도포를 입었는데 그와 상반된 하얀 피부를 가지고 머리엔 갓을 쓰고 있었다. 남자를 고개를 돌려 홍중을 바라보곤 안심하란 듯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거라" 

 

남자는 다시 고개를 돌린 뒤 들고 있던 부채로 손님을 톡 쳤다. 그러니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고래고래 목청이 터질 듯 소리를 지르던 손님이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홍중은 갑자기 잠잠해진 손님에 어리둥절했다. 뭐야? 어떻게 1초 만에 사람이 잠잠해지지..? 웅성거리던 주변 사람들도 무슨 일이 일어났냐는 듯 다시 자신들이 하던 일에 집중했다. 홍중이 멍하게 주변을 둘러보는데 앞에 서있던 남자가 뒤를 돌아 홍중을 바라봤다. 남자는 멍한 표정의 홍중을 보며 살짝 웃더니 홍중의 손을 잡곤 주막을 나가 밖으로 향했다. 갑자기 자신의 손을 잡고 나가는 남자에 홍중은 힘도 못 쓰고 남자를 따라갔다. 

 

"아니, 그, 저 일해야 하는.." 

"괜찮다, 하루쯤은 쉬어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홍중은 뒤를 돌아 주막을 봤지만 정말 자신을 막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홍중은 다시 앞을 봐 자신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남자를 봤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왠지 익숙한 느낌에 홍중은 불안한 마음은 느끼지 못했다. 둘은 저잣거리에 가 여기저기 다니며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화려한 무늬의 푸른색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부잣집 자제인 것 같았다. 근데 날 갑자기 왜..? 하며 홍중은 의문점이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도와주곤 갑자기 같이 저잣거리를 구경 하질 않나,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저기 근데 나리는 누구신데 저를..." 

"이것 보거라, 참으로 어여쁘구나. 붉은 게 너에게 잘 어울릴듯하다." 

 

홍중은 자신의 말을 끊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남자를 살짝 노려봤다.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진짜.. 그렇지만 대들어서 좋을 건 없으니 슬쩍 남자가 들고 있던 물건을 봤다. 붉은색의 실 위에 나비 모양이 있는 노리개였다. 

 

"하나 이것은 여인의 것인데.." 

"여인의 것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잘 어울리면 됐지." 

 

남자는 홍중의 얼굴 옆에 노리개를 딱 들어 번갈아 보더니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한치에 망설임 없이 값을 지불하고 홍중에게 노리개를 건넸다. 홍중은 자신에 손에 쥐어지는 노리개를 들곤 어벙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누가 봐도 이걸 왜 주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홍중에 남자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가지거라, 내가 네게 직접 주는 첫 번째 선물이다." 

"처음 보는 분께 도움을 받은 것도 모자라 어찌 선물까지 받겠습니까.. 저에게 주실 이유도 더더욱 없고요." 

"그냥 가지거라,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인데 안 받을 이유도 없지 않으냐." 

"예..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에 홍중을 고개를 끄덕거리며 노리개를 보았다. 붉은색에 노리개가 마치 제 머리 색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 괜히 기분이 좋았다. 둘은 저잣거리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처음 만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어색하지 않고 익숙한 느낌에 홍중은 괜히 새로운 사람이 생긴 기분에 미소가 입에서 떠나질 않았다. 어둑어둑 해진 하늘을 보며 재미있게 놀았으니 이제 집에 가서 쉬라는 남자의 말에 홍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달빛이 비치는 길을 따라 홍중의 집으로 향했다. 

 

"저 너무 늦게 물어보는 것 같긴 한데.. 나리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름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구나." 

"이름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라니.. 혹 이름이 없으십니까..?" 

"그래, 아무도 내게 이름을 주지 않았어." 

 

이름이 없다니.. 부잣집 자제분이 이름도 없고 이게 무슨 일인가. 사람이 태어날 때 받는 것이 이름인데 어찌 이름이 없을 수가. 홍중은 당황했다, 이름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온 거지? 서로를 부를 때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가. 

 

"아니 어찌 이름이 없으실 수가.." 

"그럼 네가 내 이름을 지어주면 어떻겠느냐, 아까부터 받은 게 많다 이리 불평을 하니. 내 이름을 지어주는 것으로 내 그 값을 받겠다." 

"예..? 아니 어찌 이름 하나로 이 많은 것들을.. 그리고 제가 감히 이름을 짓다니요." 

"어허, 괜찮대도. 응? 어서 내 이름을 지어주거라." 

 

홍중은 대뜸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달라는 남자에 머리가 팽팽 돌았다. 아까부터 너무 많이 사주시는 게 아니냐 불평은 했다만 이걸 이름 하나도 퉁친다니. 그리고 이름은 또 뭘로 지어야 하나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홍중은 고심하며 이런저런 이름들을 생각해 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딱 완벽하게 남자와 어울리는 게 없었다. 홍중은 고개를 들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반짝거리는 별을 보며 생각해낸 이름, 성화. 짙은 머리 색과 별을 담은 눈동자에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홍중은 결심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그럼.. 별 성, 될 화로 성화는 어떻습니까..?" 

"성화라..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좋다, 앞으로 나를 성화라고 부르도록 하거라."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홍중은 밝게 웃는 성화를 보며 자신도 기뻐했다. 남에게 이름을 지어준 건 처음이었다. 곧이어 홍중의 집 앞에 도착을 하고 홍중과 성화는 오늘 재미있었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성화는 그럼 내일 보자는 말을 하곤 뒤를 돌아 저 멀리 걸어갔다. 홍중은 손을 흔들며 자신도 집에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고 했지만 홍중의 머리에 스치는 한마디, 내일 보자고..? 홍중은 뭔가 싶어 다시 뒤를 돌아 성화를 부르려 했지만 아무도 없는 길만이 보였다. 아무리 빨리 간다 해도 아예 안 보일 거리는 아닌데..? 하며 오한이 들어 몸을 부르르 떨곤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역시 평상에 누워 꽤 즐거웠던 하루를 생각하며 하늘을 바라봤다. 

 

** 

** 

 

그 다음날 아침 홍중은 오늘도 일을 나가려 하품을 하며 문을 열고 기지개를 쭉 폈다. 봄이 오는지 아침에도 따뜻한 날씨에 홍중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짐을 챙기며 나가려는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홍중아! 좋은 아침이다 !" 

 

홍중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어제와 같은 푸른색 도포를 입은 성화가 자신을 보곤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지?하며 홍중은 생각했다. 아, 어제 내일 보자는 게 이거였나? 홍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성화에게 다가갔다. 

 

"제 집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음.. 심심해서?" 

"할 일도 없으신가 봅니다.." 

"너를 보는 게 내 일이지," 

"저를요?" 

"그래 홍중 너를." 

"왜 저를.." 

"자, 그럼 오늘도 힘내서 가자꾸나!" 

 

 

성화는 이번에도 홍중의 말을 끊고 손을 덥석 잡으며 홍중에 일터로 향했다. 홍중은 점점 피곤해질 것 같은 기분 때문에 몸을 떨었다. 성화는 매일 아침 홍중을 찾아왔다. 아침에 눈을 비비며 나오면 마당에 서 있다 홍중을 발견하곤 좋은 아침! 하며 인사를 해오고, 쪼그려서 세수를 하고 있으며 소리 없이 홍중의 옆에 와서 까무러치게 놀라게 한다거나. 처음엔 밀어냈지만 이젠 홍중도 포기한 상태였다. 

 

"아니 나리는 척 봐도 양반집 자제분 같으신데, 할 일도 없으십니까? 허구한 날 저에게 찾아오시니.. 진짜 왜 찾아오는지도 모르겠고" 

"오, 내가 양반집 자제분 같이 보이는 게냐?" 

"거기에 집중을 왜 하십니까... 네네 그렇게 보입니다. 아닙니까? 항상 돈을 흥청망청 쓰시질 않나 옷은 또 휘황찬란하게 입고 다니시면서 참.." 

"흐음... 양반집 자제라... 그래 그런 비슷한 거라고 해두지," 

"예?" 

"그나저나, 오늘도 일을 나가는 것이냐?" 

"예~ 일을 해야 먹고 살죠~" 

"나 한 번만 도와주면, 평생 일 안 하고 먹고 살 수 있는데, 한번 해보겠나?" 

"으.... 이거 이거 보니까 무슨 새우잡이 배에 들이려고! 그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엔 공짜가 없어요!" 

"진짠뎅.." 

"그럼 전 이만, 일하러 갑니다~" 

 

홍중과 궁시렁 거리는 성화를 뒤로하고 일터로 향했다. 성화는 궁시렁 거리다가 눈앞에 없어진 홍중을 보며 같이 가자며 쫄래 쫄래 홍중의 뒤를 따랐다. 

 

** 

** 

 

홍중은 자신의 새로운 일터로 향했다. 새로운 일터도 조용히 따라오는 성화에 홍중은 잠시 웃었다. 도착을 한 뒤 여기저기 인사를 하며 홍중은 자신의 자리로 갔다. 홍중은 자신의 자리를 정리하던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어떤 한 사람을 보곤 싱긋 웃었다. 

 

"형, 일찍 오셨네요?" 

"응,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서 말이야." 

 

그 사람의 이름은 윤호, 홍중이 여기로 일터를 옮길 때 있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자신보다 하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항상 성실하게 일하고 선한 성격 덕에 미움도 받지 않는 좋은 아이였다. 성화는 새로운 얼굴에 윤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근데 저기 뒤에 저분은 누구..?" 

"아, 음.. 요즘 나 따라다니는 사람?" 

"예? 따라다닌다니 그게 무슨.." 

"따라다닌다니! 거참 말 섭섭하게 하네. 너를 도와준 은인이지 !" 

"참나 예에. 윤호야 그냥 아는 사람이야." 

 

성화는 뒤에서 홍중을 노려 보았다. 그냥 아는 사람이라니, 전혀 친해 보이지 않잖아..하며 괜히 입술을 삐죽거렸다. 성화는 홍중에게 오늘도 끝나고 보자며 윤호를 흘깃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홍중을 기다리는 동안 성화는 계속 윤호를 생각했다. 나보다.. 어리고, 나보단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히 많은 여인들이 반할만한 준수한 외모, 나보다.. 큰 키. 아무래도 거슬렸다, 성화는 다시 주막으로 돌아와 곧 쉬는 시간일 홍중을 찾았다. 홍중을 찾으니 바로 앞에 홍중과 말하고 있는 윤호가 보였다, 성화는 살짝 심기가 거슬렸지만 미소를 띠며 홍중에게 다가갔다. 

 

"홍중아! 일은 잘하고 있었느냐?" 

"왔어요? 뭐.. 잘하고 있었죠." 

"그 내 너에게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잠시.." 

"뭔데요? 아, 윤호야 잠시만 얘기 좀 하고 올게." 

"네, 다녀와요." 

홍중은 윤호에 팔을 툭툭 치곤 성화를 따라 나섰다. 성화는 가는 와중에도 고개를 살짝 돌려 윤호를 지켜봤다. 

 

"무슨 일인데요?" 

"그.. 일터를 .. 다른 곳으로 알아보는 게 어떻겠느냐..?" 

"왜요? 여기만큼 편한 곳도 없고 전 좋은데." 

"아니 그게.. 그래! 여긴 너무 아침부터 일하지 않느냐! 아침엔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해야지, 이리 바쁘니 내가 다 정신이 없다!" 

"그럼 따라오지 말던가요, 와서 하는 것도 없으시면서," 

"아니.. 하 아니다.. 계속 일해.." 

 

성화는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나갔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일하면 좋잖아! 홍중이 말대로 돈도 적지 않게 주고... 대체 연유가 무엇이길래 내 마음이 이리 답답한 것을... 홍중은 어두운 표정으로 나가는 성화를 보고 무슨 일이 있나..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 

** 

 

오늘은 홍중이 일을 다 쉬고 하루 종일 마음 편히 푹 쉬는 날이었다. 매일 같이 오던 성화도 웬일인지 아침에 찾아오지 않았다. 홍중은 웬일로 이 사람이 안 오나 싶었지만 일단 오랜만에 맞이하는 휴일을 편하게 보내자 하며 하루에 반나절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누워있었다. 저녁에 방 안에서 나른하게 쉬던 홍중이 쾅 하며 열린 탓에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방 밖에는 성화가 환한 얼굴을 하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곧이어 보따리 하나를 방안에 두곤 신난다는 듯이 방방 거리며 말했다. 

 

"이거 입고 나오거라 어서!" 

홍중은 신나 보이는 성화를 보며 잠시 웃다가 보따리를 풀었다. 풀어보니 성화가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해 보이는 도포가 있었다. 갑자기 웬 옷이지.. 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성화를 바라보는 홍중이었다. 

 

"갑자기 웬 옷입니까?" 

"가자! 축제 구경하러!" 

"예...?" 

"오늘이 전등 축제라 들었다. 어서 나가서 같이 즐기자꾸나!" 

 

오늘이 전등 축제? 그러고 보니 어제 한창 가게들이 부랴부랴 무언 갈 준비하며 들떠 있는 모습을 언뜻 본 것 같았다. 홍중은 거의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즐기는 축제에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홍중은 서둘러 성화가 준비해 준 옷을 꺼내 갈아입고 방 밖을 나섰다. 문을 여는 소리에 성화는 뒤를 돌아 홍중을 바라봤다. 붉은색 도포가 홍중의 머리 색과 비슷해 잘 어울렸다. 성화는 잠시 멍하니 홍중을 바라봤다. 홍중은 저를 빤히 바라보는 성화에 괜히 어색한 도포 자락을 잡았다. 

 

"안 이상합니까?" 

"어여쁘다, 정말 많이." 

"다행이다..” 

"그래, 얼른 가자꾸나." 

 

둘은 축제에 도착해 신나게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을 했다. 홍중은 들뜬 마음에 성화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밝게 웃었다. 성화는 기뻐하는 홍중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홍중이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면 성화는 바로 바로 사서 홍중에게 가져다 주었다. 홍중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성화는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며 홍중에 손에 쥐여줬다. 돌아다니며 각양각색의 커다란 전등들을 보여 신기해하고 사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둘은 사람들로 복작복작한 거리를 걷다가 성화는 상인들이 파는 전등을 봤다. 

 

"홍중아, 저게 무엇이냐?" 

"저건 저기에 저희의 소원을 써서 하늘로 날리면 소원을 이루어 주는 전등입니다." 

"참으로 신기하구나, 정말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냐?" 

"음.. 간절히 빌면 이루어지겠죠?" 

"그럼 우리 하나씩 해서 하늘에 날리자꾸나." 

"좋아요!" 

 

둘은 언덕에 자리를 잡곤 전등에 각자 자신의 소원을 썼다. 홍중은 무슨 소원을 쓸지 고민을 하다가 앞에 소원을 빠르게 써 내려가는 성화를 봤다. 툭 나온 입술이 성화가 집중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홍중은 성화에 소원은 뭔지 슬쩍 고개를 뻗어 성화가 써내린 소원을 읽었다. 

 

"홍중의.. 행복..? 왜 제 행복을 비십니까? 그쪽 소원인데.." 

"그쪽 아니고 성화, 그리고 네 행복이 곧 내 행복이니 쓸 거면 너의 행복을 바라는 게 낫지 않겠느냐?"

 

지금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볼이 붉게 달아오른 홍중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두운 밤이 자신의 붉은 볼을 감춰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간질거리는 마음에 홍중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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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무슨 소원을 빌었느냐?" 

"음.. 소중한 사람이 평생 제 곁에 있도록, 다신 떠나지 않도록 빌었어요." 

"소중한 사람?" 

"네, 지금 저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요." 

홍중은 성화를 보며 미소 지었다. 홍중은 조그마한 기억이지만 자신의 부모님과 유모를 떠올리며 살짝 눈시울이 붉어졌다. 성화는 알았다, 그의 부모님과 유모 모두 홍중을 떠났다는 걸. 예전부터 홍중을 지켜봐 왔는데 모를 리가. 애써 웃는 홍중을 보며 마음이 쓰라렸다. 성화는 미소를 띠며 소매에서 팔찌 하나를 꺼냈다. 

 

"홍중아," 

"예?" 

"내가 너와 끝까지 함께 있겠다 홍아." 

 

성화는 홍중과 눈을 마주한 채 홍중의 손을 가져와 손목에 팔찌를 채워주었다. 저번에 받은 노리개와 비슷한 분위기에 팔찌였다, 붉은 실에 나비 문양이 올라가있는, 홍중과 잘 어울리는 팔찌였다. 

 

"절대 빼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거라," 

 

홍중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제 팔에 채워진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홍중은 앞에서 자신을 보며 웃는 성화를 보며 마음이 두근거렸다. 이 사람이면 정말 나와 끝까지 함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리는.. 제게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신 겁니까?" 

 

성화는 볼을 붉히며 말하는 홍중을 보고 순간 당황했다. 자신은 여태껏 그냥 평소에 자신이 하던 것처럼 도와준다고 생각하고 따로 생각은 없었는데 홍중의 말을 듣고 머리를 무언가로 친 듯 멍하니 생각했다. 자신은 홍중을 좋아하고 있다고. 성화는 얼굴을 굳히곤 홍중을 바라봤다. 홍중은 아무 대답도 들려오질 않자 불안해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고개를 드니 보이는 굳은 성화에 얼굴에 홍중은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꾹 참고 오늘 재미있었다며 꾸벅 인사를 하곤 일어나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성화는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바로 일어나 홍중을 붙잡으려 했지만 홍중은 이미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있었다. 성화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걸 인지하곤 입술을 꽉 깨물곤 한숨을 쉬며 주저앉았다. 내가 좋아하는구나 홍중이를, 평생 그저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친하게 지내기만 했지 정작 사랑은 처음이라서 자신이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멍청하게 있다가 자신의 사람을 놓친 성화는 자신이 죽도록 미웠디. 상처받은 표정에 홍중을 떠올리곤 성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홍중은 집에 도착해 방에 누워서 멍하니 울기만 했다. 이미 오면서 엉엉 우느라 지쳐 있던 홍은 옷도 벗지 않고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저의 착각인 걸까요, 그 동안 제게 베풀어주신 호의, 제게 보이셨던 미소 모두 제 착각인가요. 착각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허나 이렇게 물으니 그리 곤란한 표정을 하시는데 전.. 어떡해야 합니까... 다정하지를 말지, 웃어 주지를 말지. 아예 처음부터 절 도와주질 말지. 길고 긴 새벽을 눈물로 적신 홍중이었다. 

다음 날 아침 홍중은 밝아오는 빛에 정신을 차리곤 벌떡 일어나 혹여 밖에 성화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며 문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마당만이 자신을 반겼다. 평생을 보던 장면인데, 그 사람이 뭐라고 내 마음에 이렇게 깊게 뿌리를 박았을까. 하루 종일 일을 하며 쉬는 시간마다 거리에 나가 성화를 찾고 성화와 비슷한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뛰쳐나가 목소리를 찾았다. 결국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까지 홍중은 오직 성화만 기다렸다. 영영 안 올 것 같은 성화를 간절히 기다렸다. 홍중은 평상 위에 올라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가 그리 마음을 들춰낸 게 싫으셨습니까.. 혹은 저를 은애 하지 않으시고 오직 벗으로 생각하고 대하셨는데 제 마음이 나리께 부담을 준 것입니까. 하루 이틀 삼일, 매일매일을 성화만 그리워하며 지냈다. 일을 하다가도 주변을 둘러 보고. 괜히 저잣거리를 한 바퀴 돌아보기도 했다. 다섯 번째 밤이 지나고 홍중은 매일 밤을 눈물을 흘리며 지냈어. 너무 마음 깊이 들어와 나오지도 않는 사람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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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는 홍중이 떠나가고 다음날 아침에 홍중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때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성화는 안 된다며 제발 하루만 미뤄달라며 빌었다. 결국 성화는 홍중의 집 앞에 다다라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천황은 저번에도 올라오고 두 번째로 보는 성화에 고개를 저었다. 

 

"또 인간에게 마음을 준 거냐.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사뭇 다른 마음을 품었구나." 

"하루만, 아니 10분이라도 잠시 내려가서 말만 전하겠습니다. 이대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면 전 그와 다신 돌아가지 못합니다. 제발 이리 간절히 부탁 드립니다." 

"너의 죄는 네가 제일 잘 알 것이다. 들어가 벌을 받거라." 

 

성화는 하루하루 지나면서 아래 세상은 확인도 못하고 미쳐버릴 것 같았다. 분명 저를 원망할 홍중을 생각하면 너무 괴로웠다. 너무 보고 싶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매일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울며 지냈다. 한 달 뒤면 볼 테지만 홍중이 자신을 떠날 것 같아서, 이미 홍중을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커져버려서, 지금이 아니면 홍중을 잡지 못하고 영영 멀어질 것 같았다. 성화는 하루빨리 오해를 풀고 싶었다. 그런 성화의 마음을 알아챈 걸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성화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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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중은 오늘도 어김없이 성화가 오지 않을까 하며 집 앞을 걸어 다니면서 성화를 기다렸다. 오늘까지 오지 않으면 성화를 잊으리라 굳게 마음을 먹으며. 마른 얼굴로 밤 하늘에 별을 보던 홍중은 별 중에 가장 큰 별이 반짝하고 빛나는 걸 보았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에 홍중은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하며 뒤를 돌았다. 뒤를 도니 보이는 그리운 얼굴, 성화가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홍중은 살짝 피폐해진 성화에 얼굴을 보고 울컥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직 팔에 채워져 있는 팔찌를 본 성화는 안심했다는 듯이 웃으며 한걸음 한걸음 홍중에게 다가가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왜 지금 오셨습니까, 저를 버리신 줄 알았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왔다. 오직 너만을 위해. 이제 나에게 남은 건 너 하나밖에 없다 홍아." 

둘은 다신 멀어지지 않을 거라 맹세하며 서로를 원했고 하늘에선 무수히 많은 별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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